되새김질(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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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호의 '세탁기의 배신'
미국의 역사는 짧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미국사와 관련된 책은 미시적(微視的)일 때가 많다.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지엽적이어서 지루할 때도 있지만 사소해 보이는 일상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하다. 김덕호 교수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몇 년 전 를 읽었을 때였다. 흥미롭게 읽어서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올해 나온 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산업화가 집안에서 남성과 아이들의 일을 없애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여성의 일은 전혀 줄여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부분을 지적하며 글을 시작한다(p.37). 이어 미국에서 1920년대에 시작된 대량 생산 사회의 전제조건은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임을 상기시킨다(p.71). 포디즘(Fordism)은 물질적 조건을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
2020.08.03 -
사이먼 윈체스터의 '완벽주의자들'
지은이 : 사이먼 윈체스터 사이먼 윈체스터는 엄청난 이야기꾼이다. 공식 직함이야 저널리스트 혹은 기자로 부를 수 있겠지만 그의 책 이나 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뛰어나다. 올해 4월 나온 그의 책 역시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과학 역사 책이지만 시대와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그의 입담을 듣고 있노라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시간가는 줄 모른다. 완벽주의자들은 정밀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촉발된 과학 문명의 빠른 발전의 배경에 정밀성과 허용 오차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있음을 잘 그리고 있다. 챕터 역시 허용오차 0.1에서 출발해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에 이르는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 이런 부분까지 정교하게 배치한 저자야 ..
2020.07.20 -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중국편3'
작년 가을에 나왔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 1, 2를 마무리 짓는 3권이다.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얼른 구입해 정주행했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이 작년과 미묘하게 달랐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코로나19였다. 작년에는 ‘언젠가 가볼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이었다면, 올해는 ‘과연 갈 수 있을까?’였다. 코로나 19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독서에도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다니 놀라웠다. 3권은 실크로드의 도시들이 주인공이다. 여느 때처럼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지만 짧은 일정 탓인지 여유로운 느낌이 별로 없다. 이전에 책의 호흡과 관련해 1권을 프레스토, 2권을 아다지오로 묘사했는데 3권은 다시 프레스토로 회귀한 느낌이다. 실크로드라는 낭만적 이름과는 다르게 거칠고 척박한 과거 그리고 현재 상황을 ..
2020.06.29 -
댄 쾨펠의 '바나나'
어릴 적 바나나는 꿈의 과일이었다. 텔레비전 만화에는 등장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만날 수 없던 그런 과일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가 큰 맘 먹고 사오신 바나나를 처음 먹게 되었다. 생각보다 달지 않아서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껍질을 살살 벗겨 한 입 한 입 먹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그때 내가 먹었던 바나나는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먹는 바나나와 유전적으로는 동일한 바나나일 수 있다. 바나나는 교배 없이 홉근을 옮겨심는 것만으로도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안정적으로 대량 재배가 가능해졌지만 유전적으로 동일하기에 병에 매우 취약하다. 맛있는 바나나를 많이 먹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몇 년 전 읽은 은 이렇게 유전적 풀(pool)이 단순해지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2020.06.29 -
총보다 강한 실 -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지은이 :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내가 즐겨 읽는 형태의 글은 한 가지의 주제로 여러 방면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이다. 은 그런 측면에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책이었다. 하찮아 보이는 실로 역사를 풀다니!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인간 삶의 3대 요소인 의식주 중 의(衣)의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 실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오히려 이런 글쓰기 시도가 없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은 동물 가죽부터 시작해서 리넨, 비단, 양모, 레이온, 거미줄실과 같은 실의 재료부터 돛, 레이스, 방한복, 우주복, 수영복과 같은 다양한 의복을 다양하고 현란하게 선보인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개되는 각 이야기들의 서사성(narrative)는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면 끝나 버리고, 흥미..
2020.06.08 -
데이비드 엡스타인의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수 년 전 서점에서 매우 생경한 파란색 표지의 책을 만났다. 궁금증에 표지를 벗겨보니 책의 앞뒤면은 노란색이었다. 내용을 살펴봤다. 금새 빠져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과학으로 풀어내는 책이라니!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던 는 시간이 흘러 내가 도핑을 주제로 글을 쓰는 데에 시발점 역할까지 했다. 데이비드 엡스타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구매했다. 전작에서 다룬 ‘일만 시간의 법칙’이 출발점이다. 어릴 때부터 골프를 친 타이거 우즈로 대표되는 조기 교육과 빠른 전문화의 신화는 사실 ‘사악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고, 대신 예외적이고 오히려 느리게, 여러가지를 경험하면서, 경험의 바깥에서 사고하고, 친숙한 도구를 버리면서, 의도적인 아마추어가 되는 것이 중요함을 흥미로운 사례와 학문적인 뒷받침을 ..
2020.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