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엡스타인의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2020. 5. 25. 17:33되새김질

수 년 전 서점에서 매우 생경한 파란색 표지의 책을 만났다. 궁금증에 표지를 벗겨보니 책의 앞뒤면은 노란색이었다. 내용을 살펴봤다. 금새 빠져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과학으로 풀어내는 책이라니!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던 <스포츠 유전자>는 시간이 흘러 내가 도핑을 주제로 글을 쓰는 데에 시발점 역할까지 했다.

 

데이비드 엡스타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구매했다. 전작에서 다룬 ‘일만 시간의 법칙’이 출발점이다. 어릴 때부터 골프를 친 타이거 우즈로 대표되는 조기 교육과 빠른 전문화의 신화는 사실 ‘사악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고, 대신 예외적이고 오히려 느리게, 여러가지를 경험하면서, 경험의 바깥에서 사고하고, 친숙한 도구를 버리면서, 의도적인 아마추어가 되는 것이 중요함을 흥미로운 사례와 학문적인 뒷받침을 통해 잘 보여준다.

 

근래에 읽은 책들이 자연스럽게 떠 올랐다. <다크 호스>와 <룬샷>이었다. 실제 <다크 호스>에서다룬 ‘굴곡진 경로’나 <룬샷>의 핵심 인물 ‘버니바 부시’도 이 책에서 등장한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공통점이 많은 책들을 연달아 만난데에는 태생적으로 ‘깊게’ 들어가기 보다는 ‘넓게’ 훑기 좋아하는 내 성향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듯싶다. 앞으로도 전공 분야는 ‘소홀히’하며, '다른' 분야를 열심히 파볼 생각이다. :)

 

아쉬운 부분은 스포츠 이야기가 많이 줄었다는 점과 중간중간 내용이 겹치거나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담아 산만해지는 느낌도 있지만, 영어 제목인 <Range>처럼 ‘폭넓은 경험과 관심의 범위’를 갖자라는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래도 집중과 전문화는 필요하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I자형 인간보다는 T자형 인간이 다가올 시대에는 더 어울리겠다고 수긍하게 되었다.

 

p.52

협소한 전문화가 친절하지 않은 환경과 결합할 때, 친숙한 패턴의 경험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끔찍한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 뒤에서도 반복해서 나오지만 친절하지 않는 환경, 즉 사악한 세계에서는 반복 학습, 시뮬레이션이 통하지 않는다. 병원의 알코올 환자들에게 적용할 부분이 있다. 환자들이 부딪힐 현실은 사악하다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p.83

빠르게 변하는 사악한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후자다. 새로운 개념들을 연관 지어서 다양한 맥락에 두루 쓸 수 있는 개념 추론 능력이다.

-> 경험을 다 할 수 없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야한다. 일만 시간을 투자해 성공할 수 있는 과제는 범위가 한정되고 반복되는 것들 뿐이다.

 

p.100

샘플링 기간은 위대한 선수의 발달에 부차적인 요소 – 조기 교육을 위해 건너 뛰어도 되는 것 – 가 아니라 필수적인 요소다.

-> 조기 전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접한 뒤에 점차 범위를 좁혀 나간 훌륭한 운동 선수가 많다. 타이거 우즈는 극히 예외적인 분야의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p.143

운동 기능 조기 교육은 아이에게 좀 더 일찍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누구든 어쨌든 지나면 다 걸음마를 배우게 되며, 일찍 걸음마를 떼면 잠시나마 놀랍게 여길지 모르지만 걸음마를 일찍 떼는 것이 인생에 중요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 자녀 양육에 있어서 꼭 유념해야 할 부분.

 

p.158

내부 관점을 취하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은 <외부 관점>을 지향하는 유추를 따름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 외부 관점은 당면한 문제와 깊은 구조적 유사성을 지닌 다른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 기존의 경험 바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지관에 반하지만 마음 자세를 넓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

 

p.188

무언가를 배우는 것 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해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탐험은 교육이 제공하는 변덕스러운 사치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 혜택이다.

->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으로 정신과를 시작했지만, 생물정신의학으로 관심을 돌린 나의 경험도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p.230

허미니아 아이바라는 우리가 샘플링 활동, 사회 집단, 맥락, 직업, 경력을 통해 살아가면서 직무 적합도를 최대화하고, 나중에 돌이켜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끼워 맞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개념이므로 여전히 삶에서 이것저것 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p.253

우리는 직관적으로 초전문가만이 현대의 혁신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문화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실제로는 외부인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 문제 해결 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brainstorming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병원에서는?

 

p.296

창작자가 평균적으로 더 나은 작품을 내놓고 혁신을 이루는데 도움을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답은 창작자가 코미디에서 범죄, 환상, 성인, 논픽션, 과학적 상상에 이르기까지 스물 두 가지 장르를 얼마나 많이 다루었는가였다.

-> 내가 관심 갖는 주제나 글의 내용이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p.312

믿어지지 않겠지만, 고슴도치(큰 것 하나를 파고드는)는 자기 전문 분야 내에서의 장기 예측 능력이 유달리 떨어졌다… 가지고 있는 정보가 더 많을수록, 그들은 어떤 이야기든 간에 자기 세계관에 더 잘 끼워 맞출 수 있었다.

-> 앎이 많아질수록 주의할 부분. 얕게 많이 하는 통합가인 여우를 지향하자.

 

p.349

결국 그 절차는 모든 가용 정보를 종합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쪽이 아니라, 일단 내린 결정을 어떻게 하면 옹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치중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친숙한 도구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그게 정신의학이라 하더라도. 아널드 토인비의 말처럼 어떤 도구도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p.405

더 젊은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늘의 자신을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라. 사람은 저마다 발전 속도가 다르다. 그러니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말기를.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수 있다. 그러니 뒤쳐져 있다는 느낌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 한 노래의 가사처럼 ‘(타인과의)비교는 바보들의 놀이’이다. 유연하게 포기도, 방향 전환도 경험하자. 단 역시 이어지는 가사처럼 그 과정을 열심히 밟자. ‘최선은 우리의 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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