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쾨펠의 '바나나'

2020. 6. 29. 08:46되새김질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어릴 적 바나나는 꿈의 과일이었다. 텔레비전 만화에는 등장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만날 수 없던 그런 과일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가 큰 맘 먹고 사오신 바나나를 처음 먹게 되었다. 생각보다 달지 않아서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껍질을 살살 벗겨 한 입 한 입 먹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그때 내가 먹었던 바나나는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먹는 바나나와 유전적으로는 동일한 바나나일 수 있다. 바나나는 교배 없이 홉근을 옮겨심는 것만으로도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안정적으로 대량 재배가 가능해졌지만 유전적으로 동일하기에 병에 매우 취약하다. 맛있는 바나나를 많이 먹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몇 년 전 읽은 <바나나 제국의 몰락>은 이렇게 유전적 풀(pool)이 단순해지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책이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제목에 약간 낚인 느낌이었다. 실제 그 책에서 바나나 이야기는 초반에 잠깐 나올 뿐이었다. 원제 역시 ‘언제나 제철(Never out of season)’이었다.

 

출간된 지 조금 오래 된 책이긴 하지만 댄 쾨펠의 그때 부족했던 부분을 많이 채워줬다. 바나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노란 표지의 책에 잘 담겨있다. 책을 읽다보면 지금의 바나나와는 비교가 안되게 맛있다는 ‘그로 미셀’의 맛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금 먹고 있는 ‘캐번디시’라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위기에 싸인 바나나 일병을 구하는 저자의 결론은 유전자 변형 바나나이다. 현실적으로 품종 개량만으로는 현재의 창궐하고 있는 여러 바나나병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기에 과학의 힘을 통해 튼튼한 바나나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GMO에 대한 거부 반응이 큰 우리나라에서는 공감받기 힘든 주장이지만 식물과 인류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p.25

히에로니무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malum’을 택했다. 성서고고학자 슈나이르 레빈에 의하면, ‘악의적인(malicious)’과 비슷한 어감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malum’은 ‘사과’로도 번역될 수 있다.

-> 선악과는 사과가 아닌 바나나일 수 있다는 저자의 조사에 동의한다.

 

p.72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마토게’가 있다. 우간다의 많은 지역에서 이 단어는 ‘음식’과 ‘바나나’ 둘 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혼용된다.

-> 바나나를 단순히 과일이 아닌 식량 자원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함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p.127

그런 생각이 명징해진 것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였다…. 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 바나나를 키우기에 적합한 중앙아메리카는 거대 바나나 회사와 미국의 정치경제 개입으로 오늘날까지도 혼란에 싸여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앙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특히 콜롬비아 대학살!!

 

p.185

아르벤스는 군대를 잃었다. 군대가 대통령과 대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편에 선 것도 아니었다. 아르벤스가 그랬듯이, 군대 역시 미국이 암암리에 벌인 선전에 마비되고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물여섯살의 의대 졸업생이 있었으니, 바로 체 게바라였다.

-> 조국 과테말라를 반식민경제의 종속국사에서 경제적 독립국가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아르벤스는 ‘PR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주도 아래 이뤄진 일련의 캠페인과 여론전(미국 정부가 시행한 약간의 보여주기 무력 행위) 앞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전쟁에 있어 심리전의 중요성을 입증한 것 같다.

 

p.241

앨리 블랙의 자살에 대한 해답은 양극단의 알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한쪽 극단에는 블랙이 속죄해야 했던 UFC(바나나 회사)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었다. 다른 쪽 극단에는 블랙의 신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이 있었다. 그것은 사업이 아니라 신앙, 랍비이자 학자였던 블랙이 평생 동안 공부했던, 유대인들의 성스러운 율법 <토라>에 제시된 바로 그 신앙이었다.

-> UFC를 인수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실적에 부담을 느끼다가 온두라스에 뇌물을 건넸지만, 자신의 신앙적 양심과 상충하는 선택을 내린 것 때문에 결국 뉴욕 메트라이프 빌딩 44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뛰어내렸다. 자기 혐오를 어떻게 다스리느냐는 정신 건강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p.250

필 로우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마치 UFC가 저지른 과오를 씻으려는 듯,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다… 비록 시판용 바나나보다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그가 만든 변종들은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 온두라스에서 바나나 품종 개량 연구에 매진했던 그는 ‘골드 핑거’라는 바나나를 탄생시켰다. 갈변 현상이 없고, 녹색일 때에는 요리해서 먹고, 익으면 날로 먹고, 다발은 풍성하고, 파나마병까지 이겨내고, 다양한 환경과 기후에서 자랄 수 있지만, 문제는 맛이었다. ‘사과 바나나’로 불릴 정도였으니. 그래도 온두라스에서 미국의 과오를 회개하는듯 연구에 매진한 그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265

랜디 프레츠는 이내 말레이시아에는 “바나나 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수만 년에 걸쳐 진화한 파나마병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파나마병을 피해 동남아시아에 농장을 지었더니 잠깐 괜찮은 듯하다가 다시 초토화된 이유는 놀랍게도 이미 오래전부터 이 땅에 수 만년에 걸쳐 진화한 파나마병이 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병이 있는 곳으로 바나나가 온 것이었다. 코로나19도 그렇고 인류는 정말 바이러스로부터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