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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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혜심의 '인삼의 세계사'
믿거나 말거나, 어렸을 때 코피가 많이 났었다. 이런 저런 검사도 받아보고, 약도 먹어보고, 코 속 혈관도 지져(?)보고 그랬지만 효과가 없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면 코피가 바로 나왔다. 늦잠 자고 싶은 날은 그래서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가 나면 콧구멍을 둘둘 만 휴지로 틀어막고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누워도 되는 보증수표였으니까.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몸이 허해서 그럴 수 있다며 부모님을 종종 나를 한의원으로 데려갔다. 한의사 선생님은 진맥을 한 뒤 대부분 비슷한 말을 건넸다. 간의 열이 코로 이동해 코피가 난다는 것이었다. 보약 처방과 함께 한의사 선생님은 역시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열이 많은 내게 행여라도 인삼은 먹이면 안 된다는 것이였다. 나야 좋았다...
2020.09.22 -
김진호의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예전에 환자와 부모님이 진료실을 방문했다. 주된 이유는 젊은 환자가 부모를 계속 때려서였다.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봤다. 자세한 사정이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방문했던 병원에서 “환자가 부모에 대한 화가 너무 많이 쌓여 있다. 당분간 어지간하면 맞아줘라. 그러면 환자의 화가 다 풀리면서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처방을 받고 부모는 그대로 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 맞다 보니 몸이 성한 데가 없고, 너무 아프고,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병원을 옮긴 것이라고 했다. 허걱! 어느 집단이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과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최면으로 전생을 소환했던 사람도 있고, 성폭행 후 성치료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고, 사주나 점을 진료와 섞어서 보는 사람도 있다. 뭐 그래도 ..
2020.09.14 -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전에 일했던 병원은 특이하게 지하 1층에 진료실이 있었다. 더 특이한 것은 1층은 고기집이었다. 그리고 2층부터 5층까지 병동이 있었다. 내 방은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당연히(?) 창문도 없어서 아침에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바깥에 비가 오는지, 차가 밀리는지, 소방차가 지나가는지, 터진 쓰레기 봉투에서 냄새가 올라오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볼에 나온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곳이었다. 로버트 맥팔레인이 쓴 ‘언더랜드’는 특이한 책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장르를 정의하기 힘들다. 자연과학? 철학? 역사? 탐험? 여행? 환경? 에세이? 그렇다. 발 밑이라는 가까운 공간이지만 어두움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 언더랜드를 지은이가 여러 방향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설명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2020.08.31 -
김정후의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6-10살 때 주공 아파트에 살았었다. 큰 길에서 상당히 경사진 길을 오르고 또 올라가면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었다. 한 4-5년 살았으니 그렇게 오래 산 곳은 아니지만 더 어릴 때의 기억은 없으니 이곳이 내게는 고향하면 떠 오르는 곳이다. 매일 놀이터에서 흙장난 치고, 뒷산에 올라가 불장난 치고, 막 개막한 프로야구에 맞춰 해태 타이거스 점퍼 입은 채 야구하고, 담벼락 밑에서는 구슬놀이, 딱지놀이 하고, 비가 오면 흙 길에 수로 만들고, 눈이 오면 비료푸대로 미끄럼 타고, 아파트의 갖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바꼭질, 탐험놀이, 전쟁놀이… 그렇게 시간을 보낸 곳이다. 20대 후반 갑자기 어릴 때 살던 곳이 떠 올랐다. 오랜만에 전주에 내려가 어릴 적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류장에 내리니 큰 길..
2020.08.19 -
제프리 케인의 '삼성 라이징'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 월급이 썩 높지 않았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평촌으로 병원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예술의전당이 가까워서였으니까(슬램덩크 서태웅도 아니고 -_-). 물론 더 가까운 병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술의전당 지척에 있는 반포성모병원은 경기도 및 충청도까지 순환 근무가 있다 하길래 제외했다. 삼성서울병원 역시 가까웠지만 음, 여기는 지원할 성적이 되지 않았다. -_-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서울병원의 수련의 월급은 내 월급과 앞자리가 달랐다. 이럴 수가! 예술인의 마음은 어이없이 흔들렸다. 아, 다들 이래서 삼성 이름이 붙은 직장에 가려고 하는 구나. 내 마음에 삼성이 진지하게 각인된 첫 순간이었다. 삼성은 우리 국민에게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해외에 나가 삼성 광고를 ..
2020.08.13 -
김동현의 '플레인 센스'
어떤 분야이든지 경험치가 만랩인 대가를 만나면 뭔가 아우라가 느껴진다. 학회나 grand round에서 원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 어렵고 방대한 내용을 매우 단순하고 쉽게 풀어낸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디 정신과만 그렇겠나. 세상 모든 분야가 그럴 것이다. 이번에 읽은 김동현 기장의 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7장 ‘아마추어와 프로, 그 보이지 않는 차이’에서 프로페셔널 조종사의 안전 관리 수준을 반응적, 선제적, 예측적 수준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경험치+노력치(?)에 따른 의사들의 치료 전략이 많이 중첩되었다. 그래도 더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1-4장이었다. 동서양과 역사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면서 각종 사건 사고를 묘사하는 부분은 처음 접하는 이야기..
2020.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