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2020. 8. 31. 00:01되새김질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전에 일했던 병원은 특이하게 지하 1층에 진료실이 있었다. 더 특이한 것은 1층은 고기집이었다. 그리고 2층부터 5층까지 병동이 있었다. 내 방은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당연히(?) 창문도 없어서 아침에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바깥에 비가 오는지, 차가 밀리는지, 소방차가 지나가는지, 터진 쓰레기 봉투에서 냄새가 올라오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볼에 나온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곳이었다.

 

로버트 맥팔레인이 쓴 ‘언더랜드’는 특이한 책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장르를 정의하기 힘들다. 자연과학? 철학? 역사? 탐험? 여행? 환경? 에세이? 그렇다. 발 밑이라는 가까운 공간이지만 어두움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 언더랜드를 지은이가 여러 방향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설명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처럼 다가오니까, 정신과 시간의 방 장르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영국인인 저자는 주로 유럽에 위치한 언더랜드를 방문한다. 1부에서는 망자를 묻고 기억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어 온 영국 서머싯 주 멘딥힐스의 동굴, 물리학자는 암흑물질을 찾고 있고 광부는 탄산칼륨을 캐고 있는 영국 요크셔의 불비 광산, 나무와 곰팡이가 서로 소통하며 공생하는 지하 네트워크를 배우기 위해 방문한 영국 런던 근교의 에핑 포레스트를 방문한다. 개인적으로 윔프WIMP(약하게 상호 작용하는 무거운 입자), 우드 와이드 웹이라는 개념을 새로 알게 되어서 좋았다.

 

2부에서 저자는 석회암을 매개체로 프랑스, 이탈리아, 슬로베니아를 방문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과거 석회암을 채석했던 공간이 도시 아래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카타콩브(카타콤)을 며칠 동안 탐험하고, 이탈리아의 북동쪽 일 카르소(카르스트)에서 땅 위가 아닌 땅 아래로 흐르는 티마보강을 찾아가고, 2차 세계대전 중 ‘포이베 대학살’이 일어난 율리안 알프스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곱씹어본다.

 

3부에서 저자는 추운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르웨이의 외딴 해변에 위치한 콜헬라렌 동굴에서 붉은 댄서가 춤추는 벽화를 보고, 다시 안데네스 항구를 방문해 탄성파 탐사기로 석유를 찾던 석유회사와 맞서 싸운 인물 비요나르 니콜라이센을 만나고, 얼음 속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그린란드의 크누드 라스무센 빙하로 떠나고, 마지막으로 고준위 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핀란드의 올킬루오토 섬을 방문한다. 전반적으로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일으키고 있는 폐해에 대해 나지막이 꾸짖는 어투와 함께.

 

나름 세계 지리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낯선 지명을 따라가느라 헉헉거렸다. 또 저자가 방문한 곳을 한 번쯤 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론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 그럴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그리고 저자는 왕립문학협회 회원이어서 그런지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매우 시적이다. 이게 아름다운 자연을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정녕 어려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