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후의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2020. 8. 19. 11:32되새김질

출처 : 교보문고

6-10살 때 주공 아파트에 살았었다. 큰 길에서 상당히 경사진 길을 오르고 또 올라가면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었다. 한 4-5년 살았으니 그렇게 오래 산 곳은 아니지만 더 어릴 때의 기억은 없으니 이곳이 내게는 고향하면 떠 오르는 곳이다. 매일 놀이터에서 흙장난 치고, 뒷산에 올라가 불장난 치고, 막 개막한 프로야구에 맞춰 해태 타이거스 점퍼 입은 채 야구하고, 담벼락 밑에서는 구슬놀이, 딱지놀이 하고, 비가 오면 흙 길에 수로 만들고, 눈이 오면 비료푸대로 미끄럼 타고, 아파트의 갖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바꼭질, 탐험놀이, 전쟁놀이… 그렇게 시간을 보낸 곳이다.

 

20대 후반 갑자기 어릴 때 살던 곳이 떠 올랐다. 오랜만에 전주에 내려가 어릴 적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류장에 내리니 큰 길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가게의 이름은 다 바뀌었지만 건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전에 살던 곳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재건축이 끝나 새로운 아파트가 올라와 있었다. 주변까지 다 정비가 되고 새롭게 길이 나서 옛날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아쉬웠다. 서울 둔촌동 주공 아파트 재건축을 앞두고 이주가 시작되기 전 그곳의 흔적을 사진에 담는 사람이 있었다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많이 간 곳은 아마 종로일 것이다. 정확히는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문고. 종각역에 내려서 교보문고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렜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길로 가보기를 좋아하는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길은 피맛골이었다. 반듯반듯 뻥 뚫려 있는 종로길과 달리 불과 몇 미터의 뒤에 놓인 피맛골은 비록 구불구불 비좁고, 냄새 나고,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활기차고, 인정 넘치고,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동네가 다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피맛골은 사라졌다. 물론 큰 건물들은 나름 피맛골과 비슷한 폭의 공간을 만들어 놨고, 간판을 세워 기념하고 있지만 네모반듯한 공간은 과거의 피맛골과 너무 이질감이 컸다.

 

건축가 김정후의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를 읽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건축과 도시 이야기이기도 하고, 코로나 19 때문에 해외 여행도 못 나가는 터에 ‘랜선 여행’ 비슷하게 책으로 여행이나 해보자고 가볍게 고른 책이지만, 뜻밖에 많은 내용을 건졌다. 저자가 영국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찍은 사진들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내용을 전문가 입장에서 설명을 잘 해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세 읽었다. 책의 부제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런던의 도시 재생 장소 열 곳을 잘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후 등장한 건축 사초 브루털리즘(brutalism)으로 지어진 로열 페스티벌 홀 주변 사우스 뱅크의 환경 변화,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에서 현대미술관으로 거듭난 테이트 모던, 템즈 강을 마주한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잇는 밀레니엄 브릿지, 파격적 위치와 외양이지만 모어 런던과 시너지를 낸 런던 시청, 화물창고에서 매력적인 복합단지로 변신한 샤드 템스, 실패로 끝난 전후 재건축을 다시 재건축해 교훈을 주는 파터노스터 광장, 성공적으로 도시 안에 자리 잡은 전통 시장인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중간에 놓친 부분을 다시 보완해 런던에서 보기드문 주상복합단지로 자리매김한 브런즈윅 센터, 수평도시와 수직도시의 아름다운 화음인 런던 브리지역과 초고층건물 더 샤드, 이미 감탄을 자아내지만 아직도 진행 중인 킹스 크로스.

 

저자는 말미에 ‘런던의 재생 과정이 우리 도시의 재생 과정과 같을 수 없고,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라고 말한다(p.255). 맞다. 하지만 모든 과거의 흔적을 거침없이 때려 부수는 우리 나라의 재건축은 뭔가 많아 아쉽다. 어릴 적 살던 주공 아파트를, 추억의 장소 피맛골을 그대로 보존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아마 사업성 때문이겠지만 속전속결로 부수고, 이내 상전벽해가 되어버리는 우리나라에서 귀담아야 할 이야기가 많다. 도시 재생을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 및 시민이 참여하고, 수 백 번의 회의를 하는 과정은 특히 그렇다. 개발 독재 시절처럼 여전히 속도전을 펼치며 불도저처럼 한번에 밀어붙이는 우리나라의 도시는 아직 ‘천박’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