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심의 '인삼의 세계사'

2020. 9. 22. 12:53되새김질

 

출처 : 교보문고

믿거나 말거나, 어렸을 때 코피가 많이 났었다. 이런 저런 검사도 받아보고, 약도 먹어보고, 코 속 혈관도 지져(?)보고 그랬지만 효과가 없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면 코피가 바로 나왔다. 늦잠 자고 싶은 날은 그래서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가 나면 콧구멍을 둘둘 만 휴지로 틀어막고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누워도 되는 보증수표였으니까.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몸이 허해서 그럴 수 있다며 부모님을 종종 나를 한의원으로 데려갔다. 한의사 선생님은 진맥을 한 뒤 대부분 비슷한 말을 건넸다. 간의 열이 코로 이동해 코피가 난다는 것이었다. 보약 처방과 함께 한의사 선생님은 역시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열이 많은 내게 행여라도 인삼은 먹이면 안 된다는 것이였다. 나야 좋았다. 쓴 인삼을 먹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설혜심 교수의 ‘인삼의 세계사’를 읽었다. 몇 년 전에 ‘소비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기억해 놓은 저자였다. 제목을 보고 문득 궁금했다. 인삼은 동양에서만 쓰는 것 아니었던가? 얼마 전 병원에서 특식으로 나온 갈비탕에도 인삼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외국에서는 인삼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인삼으로 어떻게 책을 풀어나갈지 기대가 되었다.

 

책을 읽다가 한 때 인삼이 세계 상품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통해 고려 인삼은 유럽으로 진출했다. 중국에서 황제에게 진상하던 만병통치약 인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품질 좋은 고려 인삼의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가격 문제도 있었지만. 관련 무역 시장은 커져만 갔다.

 

이어서 독립한 미국이 인삼 무역에 뛰어 들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화기삼이라는 북미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국에 북미삼을 수출했는데 이는 미국 최초의 수출품이었다. 하지만 그 품질은 고려 인삼에 미치지 못했고, 미국은 팔면서도 북미삼의 품질이 떨어지고, 중국만큼 손질, 보관을 못한다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잘 나가던 인삼은 위기에 빠진다. 약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유효 성분 추출이 어려운 인삼은 폄하되기 시작한다. 서구 사회가 팽창할 때 습득한 비서구 지역의 지식을 이후에는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면서 비서구의 전통을 부정하는 흐름에 입각한 것이었다(p.285). 또한 무분별한 채취로 점차 고갈되다가 대공황이 터지면서 미중 인삼 무역은 막을 내린다.

 

3부까지 깨알 같은 정보로 토대를 굳건히 쌓아간 저자는 4부 ‘인삼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전체적인 조망을 이어 나간다. 유럽인은 낯선 인삼을 처음 만났을 때 유비, 즉 타자를 자신 또는 자신의 이웃에 동화시키기 위해 문화적 거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했다(339p). 시간이 흐르면서 유비 대신 거리를 두고 배척하는 대립화로 인삼을 대하기 시작했다(344p).

 

결국 서구 사회의 인삼 담론은 신비한 동양의 만병통치약과 근대 서양 의학에 포섭되지 않는 불가해한 효능 사이의 길항 관계를 보여준다(373p). 중국만큼 가공하지 못한다는 열등감, 수출하느라 정작 내수화는 하지 못한 상황, 정량을 도출하지 못한 서양의학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인삼에 낙후성을 뒤집어 씌우는 모순적이 태도가 발생한 것이다.

 

서구 사회의 인삼에 대한 폄하의 시선은 꼭 중국인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심마니처럼 미국에도 채삼인이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배척하고 소외되는 태도로 나타난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낙후된 채삼인의 터전은 이제 내부 식민지의 특성까지 띄게 된다(p.417). 그래서 저자는 결론에서 인삼을 약리학적, 무역학적 관점 뿐만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말하며 끝을 맺는다.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몇 년 전에 인삼을 선물로 받았던 적이 있다. 나야 열이 넘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토스해서 선물로 보냈다. 그 때 이후로 통통한 인삼을 실물로 본 적이 없긴 하지만 혹시라도 인삼을 만난다면 새롭게 보일 것 같다. 인삼의 작은 뿌리를 잡고 악수라도 해야하나? 좋은 책을 늦게 나마 읽게 되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