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호의 '세탁기의 배신'

2020. 8. 3. 13:43되새김질

출처 : 교보문고

미국의 역사는 짧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미국사와 관련된 책은 미시적(微視的)일 때가 많다.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지엽적이어서 지루할 때도 있지만 사소해 보이는 일상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하다. 김덕호 교수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몇 년 전 <욕망의 코카콜라>를 읽었을 때였다. 흥미롭게 읽어서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올해 나온 <세탁기의 배신>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산업화가 집안에서 남성과 아이들의 일을 없애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여성의 일은 전혀 줄여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부분을 지적하며 글을 시작한다(p.37). 이어 미국에서 1920년대에 시작된 대량 생산 사회의 전제조건은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임을 상기시킨다(p.71). 포디즘(Fordism)은 물질적 조건을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바꾼 것이며, 테일러리즘(Taylorism)은 노동의 조건을 포디즘에 맞춰 ‘과학적 관리’라는 이름 하에 노동자들을 합리화, 표준화하려는 일련의 작업을 뜻한다.

 

가내 하인은 1870-1900년 사이에 큰 폭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가내 하인의 사회적 지위 몰락과 함께 판매직, 사무직으로의 이직이 증가했기 때문이다(p.103). 시간상 차이가 있으므로 가내 하인의 감소를 촉진시킨 것은 아니지만 회사들은 광고를 통해 가정 내 빈 틈을 전기 하인(가전 제품)으로 채우도록 광고하기 시작했다(p.132). 문제는 광고가 남녀 역할 분담의 고정된 프레임을 반영하면서 가전 제품이 남편과 주부를 위한 가사기술이 아니라 주부만을 위한 가사기술을 상기키는 방향으로 계속된 것이었다(p.152).

 

세부적인 내용으로 세탁기의 도입으로 등이 휠 것 같은 고통은 사라졌지만, 개인 위생과 청결 기준의 상승으로 세탁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세탁에 드는 총 시간은 오히려 증가했고(p.195), 비슷하게 먼지 속에 떠다니는 세균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 잡으면서 먼지떨이나 빗자루의 대용품인 진공청소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나(p.201) 더 많이, 깨끗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더 자주 청소를 하게 되었다. 냉장고의 보급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성 고착적 담론이 적용되어서 남편은 구매의 최종 결정자로, 여성은 주부로서 사용자 혹은 소비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공공연하게 나뉘었다(P.233).

 

저자는 결론에서 노동 및 시간 절약적인 가전 제품들이 줄줄이 도입되었는데도 여성들의 가사시간이 늘어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학자 루스 코완(Ruth Cowan)은 ‘기이한 패러독스(strange paradox)’ 개념을 소개한다(P.261). 즉 가사기술이 주부들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며 거창하게 광고했지만, 가사 노동은 그림자 노동으로 여겨지며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 했고, 가전제품의 도입 과정에 고전적인 남녀의 역할이 그대로 적용되면서 결과적으로 가사기술은 주부를 소외시켜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P.317). 그리고 1960년대 페미니즘과 맞벌이가 증가하면서 비로소 남성들도 가사노동에 뛰어들게 된다(P.318)

 

고교시절 논술을 연습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쓰던 개념이 ‘가치 중립성’이었다. 새삼 그 단어가 떠 오른 것은 저자 역시 ‘항상 기술이 인간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드라이브하기 전에는 기술은 그저 도구에 불과한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아, 여기까지 쓰고 보니 갑자기 부담이 확 밀려온다. 글 그만 쓰고, 세탁이 끝난 빨래들이라도 널어야겠다. 난 착한 남편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