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클렌부테롤과 수도에페드린

이진일 선수가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 800m 경기에서 우승하는 장면. 정부기록사진집 제공.


1994년 6월 17일, 전국 육상경기 선수권대회의 남자 800m 경기에서 한 육상 선수가 1분 44초 14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2년 전부터 800미터에서 금메달을 휩쓸던 선수였으니 1위로 들어오는 것은 당연해 보였지만, 선수와 육상 관계자는 모두 기록에 환호성을 보냈다. 아시아권 선수 최초로 1분 44초대로 진입한 것이었다.


선수의 이름은 이진일. 6월에 세운 기록은 당시 세계 최고기록에 불과 2초 41 모자랐고, 이전 해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의 기록보다 0초 57 앞서는 기록이었다. 이후 그의 목표는 히로시마(1994 아시안게임)가 아니라 애틀랜타(1996 올림픽)이 되었다. 그의 기록은 그 해 남자 800미터 세계 순위 7위에 해당하는 좋은 성적이었다.

이진일은 예상대로(?) 1994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했지만, 금빛 질주는 애틀랜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듬해 시행한 소변 검사에서 금지 약물인 클렌부테롤(clenbuterol)에 양성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감기약으로 추정되었다. 감기에 걸린 그가 선수촌에서 처방 받은 약이 잘 듣지 않자 약국에서 사 먹은 감기약 세 알이 화근이었다. 안타까운 사정을 하소연해 봤지만, 결국 그에게는 4년의 자격 정지 처분이 떨어졌다. 세계 무대로 날아오르던 한국 육상의 날개가 꺾이는 아쉬움의 순간이었다.


감기약으로 울룩불룩 근육 만들기

클렌부테롤은 체내에서 주로 ‘베타2’ 수용체에 작용한다(약물이 세포 안으로 들어가려면 수용체라는 통로 역할의 단백질과 결합해야 한다). 사람이 위험한 상태에 처할 때 활성화하는 교감 신경계는 크게 알파(α)와 베타(β) 수용체로 나뉘어 작동한다. 알파 수용체는 주로 피부에 존재하며, 자극을 받으면 혈관을 수축시킨다. 베타 수용체는 다시 1수용체와 2수용체로 나뉘는데, 전자는 심장에, 후자는 기관지에 많이 존재한다. 클렌부테롤이 베타2 수용체에 결합하면 기관지 평활근을 이완시키면서 기관지를 확장시킨다.

기관지를 넓히는 특성 때문에 클렌부테롤은 기도가 좁아져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천식이나 만성 기관지염의 치료에 사용된다. 아울러 기관지의 섬모 운동을 촉진시켜 가래의 배출을 돕는 소위 '진해거담(기침을 진정시키고, 가래를 제거)' 효과가 있기에 감기약으로도 종종 처방된다. 1995년은 의약분업을 시행하지 않던 때였기에 전문의약품 클렌부테롤이 포함된 감기약을 약국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편 클렌부테롤은 짧게 '클렌'이라는 이름으로 육체미를 가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방을 줄이고 근육을 늘리는 방향으로 체내에 들어온 영양분을 조절하는 '재분배 효과(repartitioning effect)'가 있기 때문이다.[1] 울룩불룩 멋진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몸 덩치 자체를 확 불린(벌크업; bulk up) 다음에 늘어난 근육을 유지하면서 지방만 빼는(커팅; cutting) 과정이 필요하다. 클렌부테롤은 '지방 연소기(fat burner)'로 불리며 커팅 과정에 흔히 사용된다. 이처럼 근육을 증가시키는 단백동화(anabolic) 효과 때문에 클렌부테롤은 금지 약물로 분류되었고, 감기약을 복용한 이진일이 의도치 않게 도핑 검사에 걸린 것이었다.

15년이 지난 2010년 클렌부테롤과 관련해 이진일처럼 억울함을 호소한 선수가 또 있었는데, 사연은 조금 달랐다. 주인공은 프로 자전거 선수 알베르토 콘타도르(Alberto Contador)였다. 2007년과 2009년 이미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도로일주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2010년 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한 달 뒤 발표된 소변 검사 결과에서 50피코그램(1 피코그램은 1조 분의 1그램)의 클렌부테롤이 검출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2009년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오르막 경사에 강했던 콘타도르가 선수들 무리(펠러톤)에서 갑작스럽게 치고 나가는(어택) 장면. https://youtu.be/ibVr481vCIk

9월 도핑 검사 결과가 발표되자 콘타도르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대회 중에 친구가 스페인에서 가져온 소고기로 만들어 먹은 스테이크가 양성 반응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얼핏 들으면 뜬금없는 변명으로 들리지만, 콘타도르는 이후 1년 반 동안 소고기를 무기로 국제자전거연맹(UCI) 및 세계반도핑기구(WADA)와의 소송에서 첨예하게 맞서게 된다.

왜 소고기였을까? 지방을 줄이고 근육을 늘려주는 클렌부테롤의 효과 때문이었다. 일부 축산업자가 지방이 적고 살코기가 많은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클렌부테롤을 은밀히 사용해왔다. 콘타도르는 소고기를 가져온 농장에서 과거 클렌부테롤이 검출된 적이 있다며 자신이 먹은 소고기가 오염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UCI와 WADA는 검사에서 추가로 발견된 가소제(플라스틱의 형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물질)가 혈액 주머니의 성분이라며 그가 3주간 자가수혈 형태로 도핑을 한 뒤에 남은 극소량의 클렌부테롤이 검출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콘타도르는 가소제 성분은 빨대로 음료를 마시다가 나올 수도 있다고 다시 반박했다.

2012년 2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양측의 주장 모두 개연성이 낮고, 콘타도르가 클렌부테롤에 오염된 식품보충제를 섭취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료에 클렌부테롤을 섞는 행위가 만연한 멕시코나 중국과 달리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은 그런 오염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 근거를 둔 판단이었다. 전해 10월에 멕시코산 소고기를 먹고 클렌부테롤이 검출된 다섯 명의 멕시코 축구 선수들이 도핑 혐의를 벗은 것과 상반되는 판결이었다.[2]

콘타도르는 결국 2년의 출장 정지를 받았다. 아울러 2010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 기록이 박탈되었고, 소급 적용된 정지 기간에 획득한 모든 우승, 상금, 점수가 반환되었다. 2012년 8월 제제가 풀린 뒤 다시 발판을 밟기 시작한 그는 2017년 9월 은퇴 전까지 세계 3대 도로 자전거 대회인 ‘부엘타 아 에스파냐’(2012)와 ‘지로 디탈리아’(2015)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약물 복용의 과거력은 은퇴할 때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그를 계속 따라 다니고 있다.


코는 뚫리고, 금은 놓치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체조의 꽃 여자 개인종합 금메달은 루마니아의 안드레아 라두칸(Andrea Raducan)에게 돌아갔다. 4종목 합계 38.893을 얻은 그는 1976년 체조의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 이후 24년 만에 개인종합에서 우승한 루마니아 선수였다. 148센티미터, 37킬로그램의 조그맣고 깜찍한 17세 소녀는 전날 획득한 단체전 금메달과 합쳐 2관왕에 오르며 시드니 올림픽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라두칸이 체조 개인종합 마루 종목 연기를 펼치는 장면.

https://youtu.be/TcH9LzV0xVY

그러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며칠 뒤 약물 검사에서 수도에페드린(pseudoephedrine) 양성 반응이 나오면서 라두칸의 개인종합 금메달이 취소되었다. 체조 종목에서 도핑 때문에 메달이 박탈된 전례가 없었기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고, 라두칸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코감기에 걸려 숨쉬기가 불편해 경기 시작 직전에 팀 주치의가 건넨 뉴로펜(Neurofen)이라는 감기약 두 알을 복용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라두칸의 상황이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의 체구가 너무나도 작기 때문이었다. 당시 검사에서 수도에페드린 양성 반응 기준은 10μg/ml였는데, 선수의 몸무게를 고려한 보정은 따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개인종합에 함께 출전한 팀 동료 아마나르 역시 동일한 감기약을 복용했지만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을 보여 메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라두칸보다 몸무게가 7kg 더 나가기 때문이었다.

수도에페드린은 에페드린과 구조가 유사한 부분입체이성질체(diastereomer)이다. 감기약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유는 교감 신경계의 알파 수용체와 결합해 코 점막으로 가는 혈관을 수축해 콧물을 줄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에페드린도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혈압을 상승시키는 부작용이 있어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수도에페드린이 감기(특히 코감기)를 치료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종합감기약의 성분을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수도에페드린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적다 하더라도 수도에페드린은 엄연한 교감신경 흥분제이다. 비록 뇌-혈관 장벽(BBB)을 잘 통과하지 못해 뇌에서 정서적 고양 효과를 크게 불러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신체 곳곳에서 생리적 각성을 유발할 수 있다. 연구에 따라 결과가 엇갈리지만 치료 범위를 넘어서는 고용량을 복용할 때에는 약간의 경기 능력 향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그래서 일반의약품으로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수도에페드린은 ‘가난한 사람의 암페타민’으로 불리기도 한다.[4]

라두칸의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수도에페드린은 2004년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금지 목록에서 제외된다. 검사 기술의 발전으로 에페드린과 수도에페드린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서 운동 능력 향상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수도에페드린이 도핑 목록에서 빠진 것이다.

많은 운동 선수와 지도자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문 선수들 사이의 경쟁에서는 승패나 성적이 간발의 차이로 결정되지 않던가. 조금이라도 유리함을 얻을 수 있는 약물이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면 마달 이유가 없었다. 2001-2007년에 WADA에서 시행한 약물 검사 결과를 살펴 보면 가시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5] 전체 검사 결과 중에서 수도에페드린이 검출되는 비율은 1.07퍼센트에서 1.61퍼센트로 의미 있게 증가했고, 특히 고용량이 검출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2001-2007년 수도에페드린(PSE)의 검사 결과의 변화 추이. 고용량이 검출되는 양상은 2004년 이후에 두드러지고 있다. 국제스포츠의학지 제공.
2001-2007년 수도에페드린(PSE)의 검사 결과의 변화 추이. 고용량이 검출되는 양상은 2004년 이후에 두드러지고 있다. 국제스포츠의학지 제공.

결국 수도에페드린은 2010년 다시 금지 약물 목록에 올랐다. 양성 판정 기준은 150μg/ml로 10년 전 라두칸이 도핑 검사에 걸렸을 때보다 완화되었다. 여전히 억울하기 때문이었을까? 2015년 라두칸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시드니 올림픽 때 박탈당한 개인종합 금메달을 다시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IOC는 재차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판정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금메달은 영영 그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감기약 두 알을 삼키고 막힌 코가 뚫린 대가 치고는 너무 컸다.


감기약, 조심하세요~

1980년대에 '깊어가는 가을 밤 성난 가을 바람이 감기를 부릅니다'라는 대사로 시작되는 감기약 광고가 있었다. 너무 오래 전 광고라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광고 말미에 물방울 무늬 스카프를 둘러 쓴 인형이 두 손을 모은 채 던지던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대사를 들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약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은 감기만 조심하면 되겠지만, 운동 선수는 감기약도 조심해야 한다. 알고 먹었든 모르고 먹었든 일단 몸에서 약물이 검출되면 100퍼센트 선수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선수들은 의학적으로 약물 복용이 필요한 상황에서 치료 자체를 거부하곤 한다. 오죽하면 작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신인 이정후 선수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아버지 이종범이 “감기약도 먹지 마라”라는 조언을 건넸겠는가.[6]

이른바 ‘무관용의 원칙’이 적용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도핑 근절을 위함이다. 약물 복용의 의도와 목적에 관계 없이 검출 사실만으로 징계를 내리면 이진일이나 라두칸처럼(콘타도르는 글쎄…)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를 인정하다 보면 선수들의 한계 떠보기가 계속될 수 있기에 국제반도핑기구는(WADA) 엄격하게 규칙을 적용하고 있다. 이를 유념해서 운동 선수는 병원을 방문할 때, 의사는 약물을 처방할 때 다음 문장을 꼭 되뇌도록 하자.

“감기약, 조심하세요~”


[1] Kearns, C.F., et al., Chronic administration of therapeutic levels of clenbuterol acts as a repartitioning agent. J Appl Physiol (1985), 2001. 91(5): p. 2064-70.

[2] Thevis, M., et al., Adverse analytical findings with clenbuterol among U-17 soccer players attributed to food contamination issues. Drug Test Anal, 2013. 5(5): p. 372-6.

[3] Trinh, K.V., J. Kim, and A. Ritsma, Effect of pseudoephedrine in sport: a systematic review. BMJ Open Sport Exerc Med, 2015. 1(1): p. e000066.

[4] Cooper, C., Run, Swim, Throw, Cheat: The Science Behind Drugs in Sport. OUP Oxford, 2013: p. 168.

[5] Pokrywka, A., W. Tszyrsznic, and D.J. Kwiatkowska, Problems of the use of pseudoephedrine by athletes. Int J Sports Med, 2009. 30(8): p. 569-72.

[6] 김승욱, 이종범 "감기약도 먹지 마라…아들에게 유일한 조언". 연합뉴스, 2017.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9/04/0200000000AKR20170904057300007.HTML.

한겨레 미래과학 2018.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