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단백동화 남성화 스테로이드①: 지글러와 디아나볼

미국프로야구(MLB)에서 활동중인 최지만. 2014년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일 때 도핑 검사에서 근육강화제 성분인 메탄디에논의 양성 반응을 보여 50경기 출전 정지를 당한 적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3년 11월 20일 새벽, 미국 해군은 일본 본토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해 하와이와 호주 사이에 있는 타라와(Tarawa) 환초의 침공에 나섰다. 하지만 공격은 물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상륙 주정이 암초에 걸려 좌초하자 해병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깊은 물에 뛰어들었고, 일본군의 십자포화를 맞으며 수많은 대원이 사망했다. 전투는 4일 동안 지속되었다. 가까스로 미국이 승리했지만 사상자가 3,000명이 넘을 정도로 피해는 예상보다 컸다.

존 보슬리 지글러(John Bosley Ziegler)는 타라와 전투의 생존자 중 하나였다. 키 193센티미터, 몸무게 109킬로그램의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지만, 격전지에서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군의관은 몸 여러 곳에 총상을 입은 그에게 향후 오른팔을 머리 위로 올리지 못하고, 목발 없이 걷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건넸다. 총알을 제거하고 뼈를 맞추는 큰 규모의 수술과 이후 고통스러운 재활 치료를 겪으면서 그는 가업인 의술을 잇기로 결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의대 학업과 신경과 수련을 마친 지글러는 메릴랜드의 한 도시에서 개업을 했다. 그의 명석함과 유쾌함 덕분에 의원은 이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정작 소규모의 공간에서 진료만 하는 삶이 불만족스러웠던 그는 시바(CIBA)라는 제약회사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시바사가 막 개발한 디아나볼(Dianabol)이라는 스테로이드 약물로 과거의 자신처럼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디아나볼은 훗날 그에게 ‘스테로이드의 대부’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선사했다.


‘스테로이드의 대부’

운동광이었던 지글러는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 곳에서 여러 육체미, 역도 선수들과 안면을 튼 계기로 그는 1954년 월드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하는 미국 역도 팀의 주치의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대회장에서 우연히 소련 코치에게 선수들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사용해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년 뒤 모스코바에서 다시 대회가 열릴 때 그는 소련 선수들이 승리를 위해 각종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다.

“동구권과 소련 선수들이 운동 경기(특히 힘을 필요로 하는 종목)에서 이기려고 모든 수단을 쓸 겁니다.”[1]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에서 소련은 총 96개의 메달을 따 내면서 74개의 메달 획득에 그친 미국을 압도했다. 공산주의 국가가 총 메달 개수에서 미국을 앞선 일은 처음이었다. 1959년 국제 아마추어 농구 챔피언십 대회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62 대 37로 대패하자 미국 언론은 우려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2차 대전 후 세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체제의 우월함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때에 운동 경기 역시 단순한 육체 활동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지글러에게 역도 경기는 외딴 남태평양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투의 재현이었다. 미국 선수가 별 다른 준비 없이 약물로 경기력을 한껏 끌어올린 상대와 맞붙는 것은 무장하지 않고 전투에 나서는 무모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던 참전 용사는 새로운 적과의 싸움에서 의사로서 소임을 다하길 원했다. 이미 자신과 몇몇 선수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디아나볼의 근육 강화 효과를 확인했던 그는 국가 대표 선수들 역시 디아나볼로 1960년 로마 올림픽을 준비하기 원했다.
디아나볼의 화학 구조. 디아나볼은 상품명이며, 그 성분명은 메탄디에논(methandienone)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디아나볼의 화학 구조. 디아나볼은 상품명이며, 그 성분명은 메탄디에논(methandienone)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하지만 역도 국가 대표 코치는 디아노볼의 효과를 확신하지 못했고, 대회 직전에 새로운 약물을 선수들에게 건네는 것을 주저했다. 이와 달리 체육관에서 지글러에게 디아노볼을 받아 복용해 본 사람들은 점차 그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이들은 벌써 미국에서 가장 우람한 근육을 갖게 되었다. 체육관 운영자는 새로 고안한 ‘고정된 물체를 미는 등척성 수축(isometric contraction) 훈련’ 덕분이라고 주장했지만 비밀은 오래 가지 못했다.[2] ‘지글러 박사의 신비한 분홍색 약’은 역도, 육체미 선수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 운동 선수들에게도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도핑의 역사를 살필 때 지글러는 ‘스테로이드의 대부’ 혹은 ‘디아나볼의 아버지’로 종종 소개된다. 별명만 놓고 보면 그는 약물 복용의 윤리성이나 운동 경기의 공정성을 해치는 스테로이드 도핑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악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내적 동기는 젊을 적 태평양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한 것처럼 냉전 시대에 새로운 적과의 싸움에 의사로서 나서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운동 선수의 약물 복용이 윤리적으로 별 문제가 없던 때였다.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쳤던 그에게 도핑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현재의 시각을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것 아닐까?


다양한 종류의 스테로이드

이제까지 도핑과 관련해 여러 중추신경 관련 약물을 다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면, 악명(?) 높은 스테로이드(steroid)가 빠졌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운동 경기 분야에서 불법 약물로 분류된다는 이유로 스테로이드를 무작정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스테로이드는 종류가 다양해 우리 몸에서 여러 기능을 담당하며, 형태에 따라서는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3]

스테로이드는 탄소 17개로 이뤄진 스테로이드 핵을 갖는 물질을 총칭한다. 인체 내에서 기능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당질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는 다양한 스트레스(긴장, 통증, 감염 등)에 반응하여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신진 대사에 관여한다. 소염 효과가 있어 피부 질환이나 천식의 치료에 흔히 사용된다. 고용량 복용 시에는 심리적 각성 효과로 인해 경기력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불가피한 의학적 사유(예, 천식) 외에는 운동 경기 중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4] 무기질코르티코이드(mineralocorticoid)는 전해질 대사 및 혈압 조절에 관여하는 호르몬으로 아직까지 금지된 적은 없다.
왼쪽 : 스테로이드 핵(steroid nucleus)의 화학 구조. 오른쪽 : 테스토스테론의 구조. 역시 스테로이드 핵을 기본으로 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왼쪽 : 스테로이드 핵(steroid nucleus)의 화학 구조. 오른쪽 : 테스토스테론의 구조. 역시 스테로이드 핵을 기본으로 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남은 한 종류의 스테로이드는 성 호르몬(sex hormone)으로 두 개의 여성 호르몬(프로게스테론, 에스트로겐)과 한 개의 남성 호르몬(안드로겐)으로 이뤄진다. 프로게스테론은 주로 임신 유지를, 에스트로겐은 여성의 성적 특징(예. 유방 발달)을 담당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 호르몬은 금지 약물 목록에 오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는 남성 호르몬 안드로겐(androgen)이 도핑에서 주로 사용된다. 이 물질은 단백동화(혹은 근육 강화; anabolic)와 남성의 성적 특징(예, 변성기) 발현(androgenic)에 관여하기 때문에 흔히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AAS; anabolic androgenic steroid)로 불린다. 1950년 대에 러시아 역도 선수들이 사용한 테스토스테론도, 지글러가 확산에 크게 일조한 디아나볼도 여기에 속한다.


‘챔피언의 아침 식사’

1960년대 후반,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 즉 AAS는 지글러가 다니던 체육관을 넘어 운동 경기 분야 전체에 널리 퍼졌다. 한 육상 월간지의 편집장이 AAS를 ‘챔피언의 아침 식사’로 부를 정도였다.[5] 그러나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처음 도입된 도핑 검사에서 AAS는 금지 약물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기술로서는 스테로이드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의학계가 AAS의 근육 강화와 운동 능력 향상 효과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효과에 감탄하는 운동 선수들이 알게 모르게 AAS를 사용하는 동안 의학계의 상반된 견해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 예로 미국대학스포츠의학회(ACSM)는 1987년에서야 AAS가 비효과적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했다.[6]

선수들과 의학계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는 1980년대 이전 연구들에 방법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의학 연구에서 어떤 약물이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무작위 배치, 이중 맹검, 위약 시행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실험 대상인 약물을 비교할 수 있는 위약(placebo)이 있어야 하고, 참가자 중 누가 약물을 복용할지를 무작위로 정해야 하며, 연구자나 참가자 모두 주고 받은 약물이 실제 약물인지 위약인지 알 수 없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실에서 설정한 환경이 현실에서 선수들이 AAS를 복용하는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진은 임상에서 호르몬이 부족한 환자에게 처방하는 용량 정도를 실험 참가자에게 주었지만, 선수들은 권장 용량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양을 복용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참가자와 운동 선수 사이에 평소 운동량, 단백질 보충제와 같은 보조 영양 식품 섭취, AAS 외의 다른 약물 사용 등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요인이 존재했다.

기존의 여러 문제점을 보완한 연구 결과는 어떨까? 방법의 설계가 잘 이뤄져 AAS의 효과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연구를 하나 살펴보자.[7] 연구진은 참가자를 ‘무작위로’ 나눈 두 집단에게 테스토스테론과 ‘위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두 집단을 다시 운동을 하는 집단과 하지 않는 집단으로 나눠서 운동의 효과를 배제하고 순수한 테스토스테론의 효과만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실험이 진행되는 10주 동안 참가자의 ‘운동 방법’과 ‘먹는 음식’은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테스토스테론은 ‘생리적 농도를 상회하는(supraphysiologic)’ 양이 사용되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테스토스토론을 복용하면 제지방체중과 운동 능력이 좋아진다. 운동과 테스토스테론 사용을 병행하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NEJM> 제공, 변형
운동을 하지 않아도 테스토스토론을 복용하면 제지방체중과 운동 능력이 좋아진다. 운동과 테스토스테론 사용을 병행하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제공, 변형

테스토스테론의 효과는 예상대로 놀라웠다. 테스토스토론을 투여한 참가자는 운동을 하지 않고도 제지방체중(fat-free mass; 체중에서 체지방을 제외한 값)이 3.2kg 증가했다. 제지방체중이 주로 근육이어서 참가자의 힘도 같이 늘어났다. 스쿼트(squat; 역기를 든 채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 강도가 19%, 벤치프레스(bench press; 누운 자세로 역기를 들어올리는 동작) 강도가 10% 증가했다. 정리하면 10주 동안 운동을 하지 않고 테스토스테론만 맞아도 근육이 늘어나고 운동 능력의 기본인 힘이 향상되었다. 테스토스테론 주사에 운동까지 더하면 효과는 더욱 분명했다. 실험실에서 현실처럼 재현한 상황은 왜 운동 선수들이 왜 AAS를 아침 식사로 먹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나쁜 결과로 끝난 선한 동기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의사인 지글러는 디아나볼을 소량만 처방하면서 부작용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약물의 효과에 감탄한 선수들은 의학적 권고를 콧등으로 흘려 들었다. 약물을 많이 먹는 만큼 근육도, 힘도 늘어날 것이란 생각에 양을 점차 늘려 처방 받은 용량의 20배까지 복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크게 실망한 그는 1967년도에 체육관과의 관계를 모두 정리했다. 훗날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했던 적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죠. 과거로 돌아가서 내 삶에서 그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어요.”[2]

지글러는 의학에 대한 열정과 환자를 향한 애정으로 디아나볼이란 씨앗에 물을 줬지만, 돋아난 싹은 그가 원했던 방향으로 자라나지 않았다. 그의 선한 동기가 나쁜 결과로 끝난 배경에는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의 탁월한 효과, 그리고 부작용을 무릅쓰고 과다 섭취한 선수들의 만용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운동 경기가 국가간 경쟁의 대리전 성격을 띄게 만든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존재했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 동독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스테로이드 도핑을 관리하고 강요했던 엄혹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②부에서 계속)


[1] Johnson, M., Spitting in the Soup: Inside the Dirty Game of Doping in Sports. 2016: p. 126.
[2] Fair, J.D., Isometrics or Steroids? Exploring New Frontiers Of Strength in the Early 1960s. Journal of Sport History, 1993. 20(1): p. 1-24.
[3] Cooper, C., Run, Swim, Throw, Cheat: The science behind drugs in sport. 2012: p. 134-6.
[4] Duclos, M., Glucocorticoids: a doping agent? Endocrinol Metab Clin North Am, 2010. 39(1): p. 107-26, ix-x.
[5] Hendershott, J., Steroids: Breakfast of champions. Track and Field News, 1969. 22(3).
[6] American College of Sports Medicine position stand on the use of anabolic-androgenic steroids in sports. Med Sci Sports Exerc, 1987. 19(5): p. 534-9.
[7] Bhasin, S., et al., The effects of supraphysiologic doses of testosterone on muscle size and strength in normal men. N Engl J Med, 1996. 335(1): p. 1-7.


한겨레 미래과학 201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