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옌센과 암페타민

옌센이 경기 도중 쓰러지는 장면. 유튜브 영상 갈무리 https://youtu.be/x7NC-GfVwLU



1960년 8월 올림픽이 열리던 로마는 무척 더웠다. 수은주가 40도 근처를 맴돌았지만, 남자 자전거 100킬로미터 단체시간도로경주(team time trial road race) 경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덴마크 팀은 선수 한 명이 초반에 기권해 남은 세 명이 힘겹게 경기를 이어나가야 했다. 단체시간도로경주에서 각 팀의 순위는 결승선에 도착한 세 번째 선수의 기록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경기 중반 무렵 스물세 살의 크누드 옌센(Knud Jensen)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다른 동료 둘이 휘청거리는 그를 가까스로 붙잡은 뒤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부축하며 경주를 이어나갔다. 잠시 뒤 다시 혼자 달리던 옌센은 이내 자전거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구급차가 급히 결승점 근처의 군 병원 막사로 옮겼지만,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옌센의 사망 원인은 열사병으로 추정되었다. 당일 경기에서 31명의 선수가 열사병에 걸릴 정도로 날씨가 더웠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젊은 선수의 비극적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다음날 덴마크의 트레이너가 옌센과 다른 선수들에게 로니아콜(roniacol)이라는 약물을 줬다고 고백하자 기류가 바뀌었다. 얼마 뒤에는 암페타민(amphetamine)도 같이 복용했다는 혐의가 추가적으로 제기되었다.


꺼져 가는 ‘불의 전차’ 시대

1982년에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한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가 있다. 실제 육상 선수인 해롤드 에이브러햄과 에릭 리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두 선수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각각 100m와 400m에서 우승한 영국의 육상 영웅이다. 오래 전 영화이지만, 하얀 운동복을 입은 선수들이 해변을 달리는 장면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접해봤을 것이다.

<불의 전차> 시작 장면, 유튜브 https://youtu.be/L-7Vu7cqB20


영화에서 캠브리지대학교 학생이던 에이브러햄은 개인 코치를 뒀다는 이유로 교수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교수들은 운동 경기에서 중요한 가치는 승패가 아니라 운동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여겼다. 아마추어리즘의 시각에서 볼 때 오로지 이길 목적으로 운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프로페셔널) 코치와 연습하는 행동은 비신사적이었다. 운동 경기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운동 선수가 약물로 경기 능력 향상을 꾀하는 행동 역시 묵과할 수 없었다. 1928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운동 경기 역사상 처음으로 도핑을 금지하는 규칙을 발표했다.[1]

그러나 선언적 의미를 지닌 규칙만으로는 운동 선수들이 경기력 향상 약물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과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피곤함을 떨쳐내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암페타민은 전쟁 후에 운동 선수들이 애용하는 약물이 되었다. 경주 중에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자 자전거 발판을 폭발적으로 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전거 선수들 사이에서 암페타민은 atom(네덜란드 말로 원자), la bomba(이탈리아 말로 폭탄)와 같은 별명을 얻었다.[2]

암페타민은 체내에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e)과 도파민(dopaime)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증가시킨다. 노르아드레날린은 일명 ‘투쟁-도피(fight or flight)’ 반응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긴박한 위협(예컨대 사나운 개와 마주칠 때)에 노출되면 싸우거나 도망치기 위해 생리적으로 각성(예를 들어 호흡과 심장 박동의 증가, 대사 작용 항진, 근력의 증가 등)하는데, 이를 유발하는 물질이 바로 노르아드레날린이다. 한편 도파민은 뇌의 보상 회로에 작용해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암페타민을 복용하면 말이 많아지고, 자신감이 증가하며, 넘치는 활력을 느끼게 된다.

신체적 각성과 정서의 고양 효과를 지닌 암페타민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아마추어리즘 수호자들은 운동 정신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염려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의사 루드비히 프로콥(Ludwig Prokop)도 그 중 한 명이었다.[3] 1952년 동계 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의 사물함에서 주사기와 부러진 알약을 찾아낸 뒤 그는 적극적으로 운동선수들의 약물 복용을 금지하는 데 앞장섰다.

프로콥은 옌센의 죽음을 약물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반도핑 정책을 통해 운동의 고전적 가치를 회복시킬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는 옌센의 죽음이 로니아콜과 암페타민 때문이라는 공식 보고서를 작성했고, 약물 규제의 필요성을 곳곳에서 설파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67년에 암페타민이 포함된 금지 약물 목록을 처음으로 발행했고, 1968년에 본격적으로 약물 검사를 시작했다. 약 60년 전 비극적으로 발생한 옌센의 죽음이 현재에도 활발하게 시행 중인 반도핑 규약을 이끌어낸 셈이다.


게으름이 빚어낸 ‘가짜뉴스’

정신과 전공의 시절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은 회진 전후로 질문을 받을 때였다. 한번은 교수님의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하자, 교수님은 “정말? 레퍼런스(출처)는?” 하며 재차 물어왔다. 나는 솔직하게(혹은 눈치 없게) 선배 전공의의 이름을 댔다. 교수님이 선배 전공의에게 다시 출처를 묻자 선배는 이미 의국을 떠난 또 다른 선배의 이름을 댔다. 교수님은 구전되어온 답이 틀렸다며 중요한 가르침을 줬다. “주변에서 전해 들은 정보를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꼭 출처를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돼. 안 그러면 잘못된 내용을 사실로 알게 되거든.”

도핑과 관련된 여러 기사나 논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가 옌센의 죽음이 실질적인 약물 규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덴마크의 베르너 뮐러(Verner Møller) 교수의 2005년 연구에 따르면, 옌센이 암페타민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기자와 학자가 처음 출처를 확인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받다가 점차 기정사실로 굳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4]

1960년대에 많은 선수가 암페타민을 포함한 다양한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옌센의 죽음이 도핑 때문이라는 프로콥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운동 경기 분야뿐만 아니라 의학계에서도 영향력이 컸기에 그의 주장에 사람들이 의문을 품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탈리아 법의학자가 옌센을 부검한 뒤 1961년에 덴마크 경찰 당국에 제출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몸에서는 암페타민이 검출되지 않았다. 프로콥 역시 2001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그(옌센)가 도핑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어떤 문서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군요. 내가 보고서에서 근거 없이 결론을 내린 것은 잘못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실제로 옌센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로마의 무더위 외에 탈수와 약물이 추가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고자 자전거에 물통을 싣지 않았기 때문에 탈수 현상이 나타났으며, 여기에 코치가 건넨 로니아콜의 혈관 확장 효과로 인해 증상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뜨거운 군 병원 막사에서 적절한 체온 냉각이나 수액 공급 치료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비극에 일조했다.

일각에서는 로니아콜도 약물이니까 여하튼 옌센도 약쟁이 아니냐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약물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지금과 달리 당시는 약물 사용이 불법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을 행동도 아니었다. 더욱이 운동할 때 심장이나 팔다리의 근육이 필요로 하는 혈액을 충분히 못 보내기 때문에 로니아콜에는 경기 능력 향상 효과가 없었다. 일방적 주장과 후대의 게으름 때문에 오랫동안 도핑의 화신처럼 여겨져 온 옌센의 이야기를 요즘 말로 바꿔 표현하면, ‘가짜뉴스’이지 않을까?


두 자전거 선수의 상반된 사후 대접

매년 7월에 3주 동안 열리는 도로 자전거 경주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방투산(Mont Ventoux) 구간은 험난한 경사로 악명이 높다. 1967년 경주에서 영국의 톰 심슨(Tom Simpson)은 경사를 오르다가 불과 정상을 1킬로 미터 앞에 두고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졌다. 숨을 고른 뒤 경주에 복귀했지만, 500미터 정도 더 올라가서 그는 다시 쓰러졌다. 관중과 의료진이 응급조치를 실시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부검 결과 그의 혈액에서는 알코올과 암페타민이 검출되었다.

심슨이 방투산에서 마지막으로 쓰러진 장소. 우측 상단에 추모비와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보인다. 위키미더어 커먼스 제공
심슨이 방투산에서 마지막으로 쓰러진 장소. 우측 상단에 추모비와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보인다. 위키미더어 커먼스 제공

현재 방투산은 자전거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성지 순례 장소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 심슨을 기리며 물통, 모자처럼 자전거와 관련된 물건을 추모비에 두고 간다. 아울러 영국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작은 박물관이 생겼고, 그의 이름을 딴 경주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또 벨기에의 한 자전거 경기장 입구에는 심슨의 흉상이 서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종목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한 공통점이 있지만 사후에 옌센이 받고 있는 대접은 심슨의 경우와 큰 차이가 난다. 옌센은 도핑을 하다가 죽은 선수로 기억되면서,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반도핑 정책의 선전 대상으로 이용되어 왔다. 반면 심슨은 암페타민을 복용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자전거 선수와 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선수로서 이룬 업적에서 차이가 나는 점을 감안해도 옌센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쉽지 않다.

다행히 뮐러 교수의 문제 제기 이후 옌센이 쓰고 있던 불명예의 누명은 천천히 옅어지고 있다. 한 예로 세계반도핑기구(WADA) 누리집에서 ‘암페타민 복용으로 인한 옌센의 죽음이 약물 검사의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하던 부분은 2015년 이후 사라졌다.[5] 옌센도 심슨과 마찬가지로 극한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경기에 도전하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것 아닌가. 도핑의 첫 희생자가 아닌 운동 정신의 수호자 중 한 명으로 옌센을 기억하는 것이 오랫동안 불명예로 고통받아 온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리라.


[주]

[1] Gleaves, J. and M. Llewellyn, Sport, Drugs and Amateurism: Tracing the Real Cultural Origins of Anti-Doping Rules in International Sport.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istory of Sport, 2014. 31(8): p. 839-853.

[2] Noakes, T.D., Tainted glory--doping and athletic performance. N Engl J Med, 2004. 351(9): p. 847-9.

[3] Gleaves, J. and T. Hunt, A Global History of Doping in Sport: Drugs, Policy, and Politics. 2016: Taylor & Francis.

[4] M?ller, V., Knud Enemark Jensen's Death During the 1960 Rome Olympics: A Search for Truth? Sport in History, 2005. 25(3): p. 452-471.

[5] Johnson, M., Spitting in the Soup: Inside the Dirty Game of Doping in Sports. 2016: VeloPress.



한겨레 미래 과학 2018.2.2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305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