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토마요르와 코카인

1988년 우리나라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이 열렸다. 냉전의 영향으로 연달아 반쪽으로 치러진 1980년, 1984년 올림픽과 달리 역대 가장 많은 국가가 참가해 주제가의 가사 대로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는’ 장관이 펼쳐졌다. 덕분에 우리 국민은 세계적인 선수들의 놀라운 경기력을 안방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을 누렸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열흘 전에 2.43미터를 넘으며 세계 신기록을 세운 높이뛰기 선수 하비에르 소토마요르(Javier Sotomayor)는 아쉽게도 만날 수 없었다. 쿠바가 북한을 따라 올림픽에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높이뛰기 세계신기록 보유자 하비에르 소토마요르의 2009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스>

다음 해 소토마요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8피트, 즉 2.44미터를 넘어섰다.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일반적인 축구 골대 높이만큼 뛰어오른 것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발목 부상 탓에 기록은 평소 실력에 한참 못 미치는 2.34미터였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2.45미터를 뛰어넘으며 자신이 갖고 있던 세계 기록을 다시 한 번 경신했다. 그리고 이 기록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소토마요르가 세계신기록 2.45미터를 뛰어넘는 장면. https://youtu.be/FuoeJPZBqg4>

높이뛰기 선수가 보통 20대 초반에 기량의 절정에 이르는 데 비해 소토마요르는 20대 중반 이후에도 세계 최고의 실력을 선보였다. 발목과 무릎 부상 때문에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에서 11위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지만, 그답게 1997, 1998년에 다시 세계 정상으로 복귀했다. 1999년 팬 아메리칸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며칠 뒤 실격 처리 당했다. 약물 검사에서 코카인(cocaine) 양성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달리던 경보 선수

야구나 축구가 인기를 얻기 전인 1860~187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운동 경기는 장거리 걷기(pedestrianism)였다. 에드워드 페이슨 웨스턴(Edward Payson Weston)이란 미국인은 가장 유명한 선수 중 하나였다.[1] 그는 자신의 경기에 의사를 초청하여 잠을 거의 취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거리를 주파하는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직접 보게 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1876년 영국 런던의 한 경기장에서 6일 동안 500마일(약 805킬로미터)을 걷는 경기를 펼칠 때도 의사를 포함해 2만명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에드워드 페이슨 웨스턴의 70세 때 모습. 그는 90세까지 살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에드워드 페이슨 웨스턴의 70세 때 모습. 그는 90세까지 살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런데 이런 초대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한 의대생이 경기 중간중간 웨스턴이 코카(coca) 잎을 씹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의대생이 목격담을 <영국의학저널(BMJ)>에 알리자 웨스턴의 명성에는 약간의 금이 갔지만, 도덕적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도핑 개념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학자들 사이에서 코카 잎(정확히는 코카인 성분)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일례로 로버트 크리스티손(Robert Christison) 교수가 1876년 <영국의학저널>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2] 그는 음식물 섭취 없이 약 32-48킬로미터를 걸어다닌 자신의 담당 학생 10명이 허기를 느낄 때 코카 잎을 우려낸 차를 마시도록 했다. 네 명은 완전한 안도감을, 또 다른 네 명은 중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고 보고했다. 또 자신이 직접 코카 잎을 씹으면서 약 24킬로미터를 걷거나 약 900미터 높이의 산을 내려오면서 비슷한 실험을 실행한 뒤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코카 입을 씹으면 극심한 피로가 사라지고, 미리 예방하는 것도 가능하다”.

약리학적으로 코카인은 신경세포접합부(시냅스)에 세 종류의 신경전달물질의 재흡수 억제제로 작용한다. 즉 한 신경세포(뉴런)와 다른 신경세포가 서로 잇닿아 있는 곳에서 신호 전달에 사용된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이 다시 흡수되는 것을 방해한다. 재흡수하는 신경세포 끝부분이 신경세포 전달물질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라면, 코카인은 흡입구를 막고 있는 먼지인 셈이다. 그 결과 신경세포접합부 안에서 세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인접한 신경 세포의 해당 수용체를 반복적으로 자극해 계속 신호를 보내게 된다.

뇌에서 코카인이 작용하는 과정. 출처: 주[3]
<뇌에서 코카인이 작용하는 과정. 출처: 주[3]>

코카인은 뇌에 흥분제로 작용해 초기 황홀감(initial rush)을 유발한다. 기분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지며, 일상에서 느끼는 쾌감이 강렬해진다. 또한 수면 욕구가 줄고, 식욕이 감소하며, 피곤을 덜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고대 잉카제국의 짐꾼들은 코카 잎을 씹으면서 높은 안데스 산맥을 쉼 없이 걸어 다녔고,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젊은 시절 코카인 덕분에 자신의 모르핀 중독이 나았다며 코카인을 극찬했다[4](정확히는 모르핀 중독이 코카인 중독으로 바뀐 것이었지만).

많은 운동 선수 역시 코카인이 보내는 유혹의 손길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는 1991년 코카인 복용 사실이 적발되어 15개월 출장 정지를 당했고, 1990 후반 세계를 호령했던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힝기스)도 2007년 윔블던 대회에서 코카인 양성 반응이 나와 2년간 자격 정지를 당했다(힝기스는 전면적으로 부인하다가 아예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코카인은 자양강장제?

소토마요르는 1999년 약물 검사에서 나온 코카인 양성 반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간 모든 검사에서 음성 반응이 나왔다며 자신은 누군가 파놓은 함정에 걸린 것이라 주장했다. 쿠바 정부도 사회주의 국가의 평판을 훼손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마피아가 국제적으로 벌인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며 그를 변호했다.

소토마요르와 쿠바의 해명이 미심쩍지만, 일단 그렇다 쳐도 왜 하필 코카인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코카인의 운동 능력 향상 효과는 사실 미미하기 때문이다.[5] 1885년 프로이트가 코카인을 투여한 뒤에 손아귀 힘이 증가한다고 보고한 이후 많은 연구가 시행되었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코카인이 달리는 속도나 지구력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코카인과 관련된 많은 일화뿐만 아니라 초기 연구 결과는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생리적으로 코카인이 운동 능력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사 작용을 활성화 시킨다는 근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써 보니까 좋던데” 식의 카더라 통신이 운동 선수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코카인이 유발한 고양된 기분과 명료해진 사고 때문일 수 있다. 연습할 때 기술 습득이 용이해지고, 경기에 임할 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보면 실제 운동 능력이 향상된 것이 아닌데도 좋아진 것으로 잘못 느끼게 된다.

코카인과 같은 흥분제가 운동 능력에 미치는 효과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이중 맹검’(double blind) 형태의 실험이 필요하다. 즉 약물을 건네는 연구자나 복용하는 참가자 모두 실제 약물인지 아니면 비슷하게 생겼지만 효과는 없는 위약(placebo)인지 알지 못해야 객관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약물을 복용한 뒤에 심박수가 빨라지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참가자는 위약 여부를 쉽게 알아차린다. 이런 경우 설령 운동 능력이 향상되어도 약물의 실제 효과인지 아니면 복용에 따른 심리적 효과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코카인이 운동 능력 향상 효과는 분명하지 않은 반면에 몸과 마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다. 코카인 복용 초기 황홀감이 지나가면 반대로 심하게 졸립고, 허기가 지며, 우울해진다. 6일 동안 코카인을 대량 복용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어떻게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완성했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다.[6] 또한 심장 박동의 이상, 호흡 곤란, 뇌전증 등이 유발될 수 있다.

하이드로 인격이 분열된 지킬 박사는 소설을 쓰는 동안 코카인에 취해 정서의 양 극단을 오간 스트븐슨 자신을 투영한 인물일 수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하이드로 인격이 분열된 지킬 박사는 소설을 쓰는 동안 코카인에 취해 정서의 양 극단을 오간 스트븐슨 자신을 투영한 인물일 수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운동 선수의 혹시나 하는 바람과는 다르게 코카인은 판단력이나 시간 개념을 흐리게 해 운동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고, 특히 격렬하게 운동할 경우 코카인의 혈관을 수축시키는 특성으로 인해 심장의 동맥이 막히는 치명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장점은 눈에 띄지 않고, 단점은 분명한 만큼 코카인을 일종의 자양강장제로 여기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높이뛰기 영웅의 씁쓸한 추락

2000년 8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는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기이한 결정을 내렸다. 1년 전 코카인 양성 반응을 보였던 소토마요르의 자격 정지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기로 했다. 그와 쿠바 정부의 줄기찬 결백 투쟁에 백기를 든 것이었다. 전례 없는 특혜에 대해 국제육상경기연맹은 그가 선수 위원이고, 과거 15년간 모든 약물 검사를 통과했으며, 이번 올림픽이 그의 마지막 올림픽이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자 높이 뛰기 결승전이 열리던 날은 날씨가 궂었다. 모든 선수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금메달은 비바람이 거세지기 직전에 2.35미터를 뛰어넘은 러시아의 무명 선수에게 돌아갔다. 소토마요르의 최고 기록은 5명의 선수와 함께 2.32미터였지만, 유일하게 첫번째 시도에서 성공했기에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4위로 밀려난 스웨덴의 스테판 홀름은 국제육상경기연맹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 때문에 메달을 놓쳤다며 억울해 했다.

2001년 소토마요르는 약물 검사에서 또 다시 양성 반응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근육의 양과 강도를 늘려주는 스테로이드 난드롤론(nandrolone)이었다. 그는 또 다시 자신은 결백하며 검사 과정에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번에는 쿠바 국내에서도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소토마요르의 높이 뛰기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난공불락의 세계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의 퇴장 치고는 씁쓸한 결말이었다. 참, 홀름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4년 전의 한을 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