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학] 장애선수의 의족은 신체인가 경기도구인가

2020. 4. 21. 11:09글모음

23화 기술 도핑 ④ 의족 스프린터

 

2012년 영국 올림픽 남자 400미터 달리기에서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역주하는 장면. 위키미디어 커먼스 제공 

2012년 8월4일 영국 런던의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남자 400미터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었다. 4년 동안 구슬땀을 흘려온 건각(健脚)들 사이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선수 한 명이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오스카 피스토리우스(Oscar Pistorius)로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 이래 처음으로 육안으로 식별되는 장애를 갖고 육상 경기에 출전한 선수였다. 비록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장애인이 일반인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쳤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비골 무형성증(fibular fibular hemimelia; 종아리뼈를 이루는 비골이 형성되지 않는 질환)을 갖고 태어난 피스토리우스는 한 살 때 양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의족을 아랑곳하지 않고 럭비, 수구, 테니스, 레슬링 같은 격렬한 운동을 즐겼다. 하지만 16세 때 럭비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뒤 재활 치료의 일환으로 육상을 시작했다. 실력은 일취월장으로 성장했고, 다음해 국가 대표로 발탁되었다. 2004년 그는 아테네 패럴림픽 100미터 달리기에서 동메달을, 200미터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패럴림픽 이후 피스토리우스의 이름 뿐만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별명도 유명해졌다.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별명은 그가 착용한 의족이 곡선을 그리며 칼날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주인처럼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첨단 의족은 이후 10여년 동안 경기력부터 장애의 기준까지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모양이 아닌 기능에 충실한 의족

 

“치타는 인간의 발보다 이점이 더 많죠.”[1]

 

1976년 미국의 21세 청년 반 필립스(Van Philips)는 수상 스키를 타던 중 왼쪽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게 된 그는 퇴원할 때 분홍색 나무와 고무로 만들어진 의족을 받고 낙담했다. 운동 선수였던 그에게 의족은 ‘지옥의 형벌’과도 같았다. 더 나은 의족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관련 학과에 진학한 그는 의족의 모양이 아닌 기능에 주목했다. 당시만 해도 인간의 다리와 최대한 비슷하게 의족을 만드는 것이 시장의 대세였지만, 이렇게 해서는 달리고 뛰어오르는 데 제약이 많았다. 모양만 비슷한 의족은 발에 충분한 힘을 전달하지 못했다.

 

필립스는 돌고래, 캥거루, 치타 등 여러 동물이 움직일 때 힘줄과 인대의 변화 양상을 관찰하면서 운동에 필요한 힘을 잘 전달하는 소재와 디자인 개발에 몰두했다. 1984년 그의 회사 플렉스-풋(Flex-Foot)은 강철보다 강하고 알루미늄보다 가벼운 탄소 섬유를 소재로 뒤꿈치가 있는 제이(J) 모양의 의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엘리트 운동 선수용으로 뒤꿈치가 없는 씨(C) 모양의 의족 ‘치타(Cheetah)’를 개발했다. 다리를 잃은 뒤 운동에 어려움을 겪던 많은 장애인들이 가볍고, 튼튼하며, 유연한 새로운 의족에 열광했다.

 

운동에 최적화된 플렉스-풋 치타. 위키미디어 커먼스 제공

아테네 패럴림픽에서 피스토리우스가 착용한 의족이 바로 플렉스-풋 치타이다. 그는 치타처럼 질주하며 200미터 달리기에서는 21초97의 세계 기록을 작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일반인 선수 마이클 존슨의 세계 기록에 불과 1.5초 느린 기록이었다. 이후 그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과의 경쟁 무대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장애를 극복하는 감동적인 도전에 응원이 쇄도했고, 2007년 3월17일 자국 대회 400미터 달리기에서 2위에 오르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는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불과 9일 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위원회는 그에게 찬물을 끼얹는 결정을 내렸다. 규칙 144조 2(e)항을 개정하면서 스프링이나 바퀴처럼 선수에게 이점을 제공하는 기술 장치의 사용을 금지했다. 바뀐 규칙에 따르면 탄력성이 뛰어난 의족은 스프링처럼 작용해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일종의 도핑이 되었다. IAA의 결정에는 ‘건강한 신체적 완벽과 경기력’이라는 올림픽의 암묵적인 이상(理想)을 장애인이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염려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2]

 

의족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란이 커져가자 IAAF는 과학적인 검증에 나섰다. 검사는 2007년 11월12~-13일 이틀에 걸쳐 독일 쾰른에서 진행되었다. 독일의 게르트-피터 브루그만(Gert-Peter Brüggemann)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피스토리우스와 다섯 명의 일반인 선수가 달리는 동안 대사량의 변화를 측정하고, 여러 대의 카메라로 관절의 움직임을 촬영해 분석했다.[3] 그해 12월17일 IAAF에 제출된 보고서는 피스토리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대사량 검사에서는 일정 속도에 이르면 피스토리우스의 산소 섭취량(VO2;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신체가 사용하는 산소의 양)이 일반 선수들에 비해 평균 25% 낮게 나타났다. 이는 일반 선수와 같은 속도로 달릴 때 그가 에너지를 25% 덜 쓰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동역학(kinetics) 검사에서는 일반인의 발목 관절보다 의족에서 에너지 보존이 더 많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첨단 의족이 경기력의 이점을 제공한다는 것이 ‘쾰른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보고서를 받은 IAAF는 지체하지 않았다. 2008년 1월14일 첨단 의족이 규칙 144조 2(e)항을 명백히 위반하기 때문에 피스토리우스가 ‘치타’를 착용한 채로는 IAAF 주관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반인 선수와의 경쟁을 목표로 달려온 그는 크게 반발했고, 이 문제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로 가져갔다.

 

 

5년 만에 이뤄낸 일반인과의 대결

 

피스토리우스와 변호진은 병진전략으로 재판을 준비했다. 과학적으로는 IAAF의 결정을 반박하기 위해 의족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을 재평가하는 연구를 의뢰했다. 법적으로는 규칙을 개정하는 과정의 절차적 하자를 파고 들었다. 2008년 2월 13일 IAAF의 결정 철회와 피스토리우스의 복권(復權)을 위한 항소장으로 시작된 재판은 베이징 올림픽이 목전이었기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러 생리학자와 생역학자가 모여 의족의 영향을 다시 살펴본 결과는 연구자 중 한 명인 피터 웨이안드(Peter Weyand) 교수의 근무처 도시의 이름을 따 ‘휴스턴 보고서’로 불린다. 피스토리우스의 대사량과 주법을 분석한 결과, 그가 일반인 선수보다 에너지를 17% 덜 쓰고, 양 다리를 21% 빨리 교차하며, 양 발이 지면과 떨어지는 시간은 34.5% 짧은 것으로 드러났다.[4] 해석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엇갈렸지만, 쾰른 보고서처럼 주행 시 의족의 용수철 같은 작용만 강조하면 신체 여러 부위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간과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변호진은 IAAF가 애초부터 피스토리우스를 배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의족 때문에 출발 시 충분한 힘을 얻지 못하는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임을 알면서도 최고 속력으로 달릴 때만 검사하도록 의뢰한 부분이나 평소 그의 의족을 관리하던 전문가가 참가를 원했는데도 검사 과정에서 배제한 부분을 지적했다. 또한 쾰른 보고서가 제출된 지 불과 3일만에 급하게 진행된 투표도 문제 삼았다. 운영위원회 회원 27명 중 14명이 투표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권표를 의족 사용을 금지하는 표로 계산한 결정은 명백히 의도적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석달 뒤인 2008년 5월16일 CAS는 피스토리우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IAAF가 의뢰한 검사의 범위나 결과의 해석이 편협해 의족이 이점을 제공하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애인인 그에게는 기념비적 승리였다. 하지만 명백한 제한점도 있었다. 달릴 때 선수들의 주법이 다양하고, 의족이 미치는 영향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CAS는 오직 쾰른 보고서 작성시 착용했던 의족만 허용했다. 아울러 다른 장애인 선수나 의족에는 이런 결정이 적용되지 않으며 향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판에서는 승리했지만 올림픽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일단 피스토리우스가 주종목인 400미터 달리기에서 국가 대표가 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목표를 2012년 올림픽으로 재조정했고, 절치부심 끝에 2011년 7월19일 이탈리아에서 45초 07을 기록하며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같은해 8월 우리나라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은 올림픽 무대의 전초전이었다. 장애를 딛고 일반인과 당당히 겨루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듬해 그는 런던 올림픽 참가만으로 장애인과 일반인의 격차를 좁히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400미터 달리기 예선에서 힘차게 출발하고 있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한겨레 제공

 

남과 다른 신발일 뿐이에요?

 

피스토리우스의 감동적인 질주는 이어서 개최된 런던 패럴림픽에서 절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200미터 달리기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알랑 올리베이라(Alan Oliveira)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2위에 그쳤다. 일반인과 자웅을 겨루던 그가 다른 장애인 선수에게 패배하자 경기장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경기 직후 그는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다른 선수들의 의족이 경쟁이 안 될 만큼 길었다. 그(올리베이라)가 얼마나 멀리서 뒤따라왔는지 보지 않았는가. 공정한 경기가 아니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5]

 

2012년 런던 패럴림픽 400미터 달리기에서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를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한 알랑 올리베이라. 출처/위키미디어 커먼스

평소 피스토리우스는 남과 다른 신발을 신었을 뿐이라며 의족에서 경기력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6] 그랬던 그가 다른 선수의 긴 의족을 문제 삼는 것은 의족이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 역시 아테네 패럴림픽 때 동료 선수들에게서 의족의 도움으로 키가 커진 채 달렸다는 비난을 받으며 불공정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올챙이 적을 생각 못하는 개구리와 진배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피스토리우스는 예상 못한 패배의 후유증으로 분별력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패럴림픽에서 양 다리를 절단한 선수들이 착용하는 의족의 길이는 양 팔을 좌우로 펼친 길이와 넓적다리뼈의 길이를 이용해 예측한 신장을 바탕으로 정한다. 200미터 달리기 결승전에서도 경기 전에 선수들의 신장 예측이 이뤄졌고, 여덟 명이 착용한 의족의 길이는 모두 허용 범위를 넘지 않았다. 비록 올리베이라가 대회를 3주 앞두고 평소보다 더 긴 의족으로 갈아타긴 했지만, 의족을 착용한 키는 181센티미터로 허용 신장보다 3.5센티미터 낮았다.

 

올리베이라가 긴 의족을 착용한 뒤 보폭이 넓어지면서 우승했다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 경주에서 피스토리우스는 총 92걸음을 달리며 걸음 당 약 2.2미터를 내딛었고, 올리베이라는 총 98걸음을 달리며 걸음 당 약 2미터를 소화했다.[7] 정작 보폭이 넓었던 것은 피스토리우스였다. 올리베이라의 향상된 경기력의 원인을 의족의 길이에서만 찾는 것은 단편적 접근이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양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 선수의 달리는 속력과 밀접한 관련성을 띄는 요인은 의족의 길이나 탄력이 아닌 모양인 것으로 밝혀졌다.[8]

 

 

장애인과 일반인의 경계

 

2013년 2월14일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아 죽이며 살인죄 피고인이 되었다. 블레이드 러너(runner)가 블레이드 거너(gunner)가 되어 버렸다. 최신 과학기술로 제작한 의족을 착용하고 위풍당당하게 일반인 선수들과 맞대결을 펼치던 그는 갑작스럽게 운동장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던진 질문의 반향은 가라앉지 않았다. 첨단과학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장애인도 일반인과 경쟁하는 것이 타당한가?

 

2015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물리적 보조 도구가 이점을 제공하는지 여부를 직접 검증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분쟁 시 입증의 책임을 IAAF가 떠맡았다가 패배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멀리뛰기 선수인 마커스 렘(Markus Rehm)은 피스토리우스처럼 올림픽 무대에서 뛰기 원했지만 바뀐 규정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렘이 의뢰한 검사 결과에서 의족이 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빠른 속도로 도움닫기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아 최종적인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9]

 

의족을 착용하고 올림픽에 출전하기 원했지만 바뀐 규정으로 꿈을 접어야 한 멀리뛰기 선수 마커스 램. 출처/위키미디어 커먼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이전에도 의족을 착용하고 운동장을 누빈 장애인 선수들은 많았지만 일반인 선수들의 경기력과 현저한 차이가 났기에 동일한 무대에서 경쟁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점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다. 피스토리우스의 의족은 안경처럼 자연적인 신체 한계를 극복하는 도구일까? 아니면 도핑처럼 인위적으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수단일까?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유발하는 윤리적 논란은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싶다.

 

 

참고 자료

1. Pogash, C., A Personal Call to a Prosthetic Invention. The New York Times, 2008.
http://www.nytimes.com/2008/07/02/sports/olympics/02cheetah.html.

2. Fouché, R., Game Changer: The Technoscientific Revolution in Sports. 2017: p. 112.

3. Brüggemann, G.-P., A. Arampatzis, and F. Emrich, Biomechanical and metabolic analysis of long sprint running of the double trans-tibial amputee athlete O.Pistorius using Cheetah sprint prosthesis – Comparison with ablebodied athletes at the same level of 400m sprint performance(IAAF Report). Institute of Biomechanics and Orthopaedics German Sport University Cologne, 2007.

4. Weyand, P.G., et al., The fastest runner on artificial legs: different limbs, similar function? J Appl Physiol (1985), 2009. 107(3): p. 903-11.

5. Gibson, O., Paralympics 2012: Oscar Pistorius erupts after Alan Oliveira wins gold. The Guardian, 2012. http://www.theguardian.com/sport/2012/sep/03/paralympics-2012-oscar-pistorius-alan-oliveira.

6. Moreton, C., London 2012 Olympics: Oscar Pistorius finally runs in Games after five year battle. The Telegraph, 2012.

http://www.telegraph.co.uk/sport/olympics/athletics/9452280/London-2012-Olympics-Oscar-Pistorius-finally-runs-in-Games-after-five-year-battle.html.

7. Tucker, R., Oscar Pistorius: Counting strides (as requested) and more thoughts. 2012.
http://scienceofsport.blogspot.com/2012/09/oscar-pistorius-counting-strides-as.html.

8. Taboga, P., O.N. Beck, and A.M. Grabowski, Prosthetic shape, but not stiffness or height, affects the maximum speed of sprinters with bilateral transtibial amputations. PLoS One, 2020. 15(2): p. e0229035.

9. Greenemeier, L., Blade Runners: Do High-Tech Prostheses Give Runners an Unfair Advantage? Scientific American, 2016.
http://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blade-runners-do-high-tech-prostheses-give-runners-an-unfair-advantage/.

 

 

2020.4.14 한겨레 미래과학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369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