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수영 스타 이언 소프(Ian Thorpe)의 수영복(?). 플리커(Flicker)/모튼 린(Morton Lin) 제공

“미래의 수영복은 경기 전에 고무 코팅을 몸에 뿌리는 스프레이 형태일지 모른다.”

 

- 197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에서[1] -

 

수영 선수 최윤희의 별명은 ‘아시아의 인어’였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15세의 나이로 여자 배영 100미터와 200미터, 개인혼영 200미터에서 우승을 거둔 뒤 얻은 별명이었다. 빼어난 실력과 미모를 갖춘 그는 일약 전 국민의 스타로 등극했다. 4년 뒤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압박감을 떨쳐내고 100미터와 200미터 배영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당시 금메달 못지않게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최윤희의 수영복이었다. 태극기 문양을 재해석해 하얀 바탕 위로 빨강, 파랑, 검정 줄무늬를 사선으로 넣은 디자인은 국기를 신성하게 여기던 시절에 보기 드문 파격적인 시도였다. 디자인보다 더 말이 많았던 것은 수영복의 재질이었다. 너무 얇아 몸매가 확 드러나고 심지어 신체 주요 부위까지 비치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0.01초 차이로 순위가 결정되는 종목이다. 선수들이 머리를 밀거나 전신 제모를 하는 것도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수영복 역시 마찬가지다. 멋있게 보이는 패션의 관점이 아니라 속력을 높이기 위한 기록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수영의 역사에서 수영복의 재질이나 디자인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양모나 면같은 천연 섬유를 사용하기도 했고, 반대로 나일론이나 스판덱스 같은 합성 섬유를 쓰기도 했다. 최윤희가 입었던 얇은 수영복이 대세인 적도 있었고, 반대로 온몸을 덮은 수영복이 인기를 구가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도핑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더 가볍게, 더 얇게, 더 늘어나게

 

 

1896년 1회 아테네 올림픽 때 수영에서는 100미터, 500미터, 1200미터 자유형, 그리고 그리스 해군 소속의 선원들만 출전 가능한 100미터 자유형 경기가 펼쳐졌다.[2] 헝가리에서 온 18세의 알프레드 허요시(Alfr? Haj?)는 100미터와 1200미터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쉬는 시간이 충분했다면 500미터에서도 우승했을 그는 팔꿈치부터 무릎까지 달라붙는 수영복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품위와 고상함을 강조하던 당시 체육계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꽤 파격적인 복장이었다.

 

1회 올림픽에서 수영 2관왕에 오른 알프레드 허요시. 수영복의 생김새가 요즘 선수들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회 올림픽에서 수영 2관왕에 오른 알프레드 허요시. 수영복의 생김새가 요즘 선수들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비실용적이고, 재미없고, 아름답지 않고, 옳지 않다'라는 이유로 배제되던 여자 수영 경기는 1912년 5회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열렸다. 100미터 자유형과 400미터 계주 경기가 열렸는데, 계주에서는 영국팀이 우승을 거뒀다. 여성이 힘들까 봐 두 경기만 치르도록 배려(?)하던 보수적인 시대에 영국 선수들은 과감하게 짧은 수영복을 입고 사회 통념에 담대하게 도전했다.

 

5회 올림픽 수영 계주에서 우승을 거둔 영국의 여성 선수들과 목에서 발까지 이르는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가운데)이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5회 올림픽 수영 계주에서 우승을 거둔 영국의 여성 선수들과 목에서 발까지 이르는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가운데)이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수영이 본격적인 운동경기가 되었을 때부터 선수들은 헐렁하고 무거운 수영복을 피했다. 그러나 양모나 면으로 만든 당시의 수영복은 물에 들어가자 마자 흠뻑 젖어 선수들의 피부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효과적인 수영을 방해했다. 이런 점을 간파한 호주의 알렉산더 맥래(Alexander MacRae)는 소수성(疏水性; 물꺼림성) 소재인 견사(silk)를 사용해 레이서백(racer-back) 형태의 수영복을 제작했다.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1929년 맥래는 회사 이름을 스피도(Speedo)로 바꾸면서 기존에 운영 중이던 속옷 사업은 정리하고, 수영복 사업에 매진했다.

 

레이서백 형태의 수영복은 어깨와 등을 노출시켜 선수들이 자유롭게 팔을 사용할 수 있었고, 몸에 더욱 밀착되어 물의 저항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레이서백 형태의 수영복은 어깨와 등을 노출시켜 선수들이 자유롭게 팔을 사용할 수 있었고, 몸에 더욱 밀착되어 물의 저항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30년대 초반 레이서백 형태의 수영복은 선수들 사이에서 대세가 되었다. 경기력이 향상되는데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대중의 시각은 달랐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200미터 여자 평형에서 우승한 호주의 클레어 데니스(Clare Dennis)는 견갑골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부적절한 수영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잠깐이지만 실격 처리를 당했다. 남자 선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상반신을 드러낸 수영복이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역시 논란이 발생했다. 주요 해변가에서 팬티 형태의 수영복을 볼 수 없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한 호주의 여성 수영 선수들. 20년 전의 수영복보다 더 몸에 달라 붙고, 신체 노출이 더 많아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한 호주의 여성 수영 선수들. 20년 전의 수영복보다 더 몸에 달라 붙고, 신체 노출이 더 많아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시간이 지나면서 수영복의 재질은 합성 섬유로 대체되었다. 1956년 스피도는 매끄럽고, 부드럽고, 물꺼림성이 높은 나일론으로 만든 수영복을 선보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또 다른 합성 섬유인 스판덱스를 사용한 수영복이 등장했다. 수영복은 첨단 과학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뮌헨 올림픽 수영 경기에서 22개의 세계 기록 중 21개가 신축성이 뛰어난 스피도의 스판덱스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7관왕에 오른 원조 수영 황제 마크 스피츠(Mark Spitz)가 입었던 작디작은 수영복도 스피도의 제품이었다.

하지만 뮌헨 올림픽에서 더 큰 화제를 모은 것은 동독 선수들이 입은 매우 얇고 몸에 착 달라붙는 수영복이었다. 아주 가는(gossamer) 면으로 만든 수영복이 물에 젖으면 몸이 거의 다 비쳐 일명 ‘피부복(skinsuit; 스킨수트)’으로 불렸다. 이듬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동독 여자 선수들은 이전보다 노출은 덜하지만 스판덱스로 만든 스킨수트를 입고 14경기 중 10경기에서 우승했고, 7개의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는 기염을 토해냈다(물론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AAS)의 도움이 더 컸겠지만). 이후 스킨수트는 대세가 되었다. 오죽하면 미래의 수영복은 선수의 몸에 고무 코팅을 뿌리는 스프레이 형태일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아시안 게임에서 최윤희가 입었던 수영복도 바로 스킨수트였다. 속력을 위해 민망함을 불사한 선택이었다.

 

 

인간의 피부를 상어의 피부처럼

 

 

1990년대가 되면서 수영복 연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유체역학(fluid dynamics)이나 경계층제어(boundary layer control) 같은 분석 방법을 통해 실제적인 항력(抗力; 물체가 유체 내에서 운동할 때 받는 저항력)을 살피기 시작했다. 연구가 거듭되면서 선수의 몸(체형, 크기, 피부) 자체가 헤엄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드러났다. 이후 수영복의 진화는 선수의 몸 자체를 보다 '물에서 역동적(hydrodynamic)'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스피도는 '아쿠아블레이드(Aquablade)'를 선보였다. 반짝이는 부분과 흐릿한 부분이 반복되는 세로 줄무늬의 수영복이었다. 육안으로는 기존의 수영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반짝이는 부분은 부드러운 재질로, 흐릿한 부분은 거친 재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질에 따라 물의 흐름에 차이가 나면서 소용돌이가 생성되었고, 이로 인해 빠르게 헤엄칠 때 물이 수영복 표면을 더 밀접하게 감싸 안았다. 일본의 연구진은 여자 선수들의 경우 기존 수영복을 입을 때보다 9퍼센트의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보고했다.[3]
스피도의 경쟁사 아디다스는 1998년 전신을 덮는 '제트컨셉트(Jetconcept)'를 출시했다. 신체 형태에 의해 형성되는 형상 항력(form drag)이 신체 표면에 의해 형성되는 마찰 항력(friction drag)보다 7배 높다는 자체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제품이었다.[4] 형상 항력을 줄이기 위해 제트컨셉트의 표면은 리블렛(riblet; 갈비뼈 모양의 미세한 돌기)으로 덮여졌다. 리블렛은 헤엄칠 때 발생하는 와류를 흘려 보내는 통로 역할을 해 선수의 등에 얹어지는 물의 양을 감소시켰다. 호주의 수영 스타 이언 소프(Ian Thorpe)는 제트컨셉트를 입고 각종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처럼 수영복 회사들은 신체 형태를 조절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매끈한 골프공보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골프공이 더 멀리 날아가는 원리를 밝힌 항공학(aeronautics) 기술이 수영복 제작에 도입되었다. 선수의 몸을 비행기의 날개처럼 제어할 수 있다면 물 속에서 보다 '높은' 곳에서 헤엄을 치면서 보다 '빠르게' 나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선수의 몸을 압박해 보다 이상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면서도 팔, 다리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지원하는 전신 수영복과 매끄럽지 않고 까끌까끌한 소재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스피도는 상어의 피부를 모방한 리블렛을 적용해 전신 수영복 '패스트스킨(Fastskin)'을 개발했고, 또 다른 수영복 회사 아레나는 '파워스킨(Power)’을 제작했다. 첨단 과학이 스포츠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물이었다.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소프는 제트컨셉트를 입고 세 개의 금메달과 은메달 두 개를 거머쥐었다. 스피도의 패스트스킨을 착용한 선수들은 세계 기록 15개 중 13개를 작성했고, 수영에 걸린 메달의 83퍼센트를 휩쓸었다.

 

 

도구인가? 복장인가? 논란의 서막

 

"경기 중 선수의 속력, 부력 또는 지구력을 돕기 위한 어떤 장치도 사용 또는 착용할 수 없다."

- 2000년 국제수영연맹(FINA)의 경기 규정(rule SW) 10.7 -

 

까만 상어처럼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의 등장은 다른 종목보다 비교적 규칙이 단순한 수영 경기에도 최신 과학기술이 파고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일각에는 첨단 수영복이 스포츠의 윤리성, 진실성, 순수성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염려도 존재했다. 2000년 4월 미국의 브렌트 러셀(Brent Russel) 교수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보낸 문서에서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과거에는 선수의 기량만이 경기를 결정지었지만, 이제는 기량과 도구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나고 연습을 많이 한 선수가 아니라 경기력을 최고로 향상시키는 수영복을 입은 선수에게 금메달이 돌아갈지 모른다."[5]
전통적으로 수영복은 ‘복장’이었다. 비록 소재를 바꾸고, 다자인을 바꾸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었지만, 경기력 논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신 수영복은 달랐다. 물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항력을 줄여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수영복 회사들은 수영복이 복장에서 도구로 탈바꿈한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자사 제품을 입은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판매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신 수영복이 100년 전 수영복처럼 몸을 가리는 고상함이 아닌 부력과 속력을 목표로 했음이 명백했는데도 FINA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러셀 교수는 FINA의 안이한 판단을 비난했다. FINA는 첨단 수영복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좋은 기록을 내면 수영의 인기와 위상이 높아지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기 규정 10.7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에만 초점을 맞춰서 항력을 감소시키는 전신 수영복의 효과를 추진력에 도움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인간끼리 펼치는 경쟁의 소중한 가치가 사라지고, 선수들은 과학 기술의 산물에 몸을 우겨 넣은 실험실의 쥐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전신 수영복에 대한 허가는 떨어졌다.
하지만 8년 뒤 더욱 진화한 전신 수영복은 급기야 ‘기술 도핑(technology doping)’이란 말까지 낳으며 더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하편에서 이어짐)

 

참고 자료

 

1. Campbell, J., Light, Tight and Right for Racing. Sports Illustrated, 1974. http://www.si.com/vault/1974/08/12/616563/light-tight-and-right-for-racing.

 

2. 에릭 샬린, 처음 읽는 수영 세계사. 이케이북, 2018: p. 326-7.

 

3. Shimizu, Y., et al., Studies on fluid drag measurement and fluid drag reduction of woman athlete swimming suit. Transactions of the Jap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ing, 1997. 63(616): p. 3921-7.

 

4. Adidas presents new bodysuit: the JETCONCEPT. EurekaAlert!, 2003. http://www.eurekalert.org/pub_releases/2003-07/aa-apn071803.php.

 

5. Rushall, B., A Serious Threat to the Very Nature of Competitive Swimming  or Not? 2000. http://swimmingcoach.org/a-serious-threat-to-the-very-nature-of-competitive-swimming-or-not/.

 

 

 

2020.1.13 한겨레 미래과학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241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