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학] 고된 길 피해 지름길로 온다면…인정해야 할까

2019. 11. 13. 13:04글모음

19화 혈액 도핑 ④
적혈구생성인자(EPO)를 둘러싼 논란

 

젊은 자전거 선수들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종종 들려오는 소식이다. 왼쪽은 1991년 27세로 사망한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드레이저. 오른쪽은 2018년 23세로 사망한 벨기에의 미카엘 굴러라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1991년 5월 미국 <뉴욕타임스>에는 ‘원기를 북돋는 약물이 운동 선수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1]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탄생해 시장에 풀린 지 4년밖에 안 된 적혈구생성인자(EPO)가 바로 주인공이었다. 기사는 자전거 경주 선수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던 EPO의 질주에 멈추개(브레이크)를 거는 내용이었다. EPO가 최근 유럽의 프로 자전거 선수 18명의 죽음과 연관될 수 있다는 소식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개된 선수들 중 한 명은 1990년 2월 27세로 숨을 거둔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드레이저(Johannes Draaijer)였다. 직전 해 프랑스 도로일주 자전거 대회(투르 드 프랑스)에서 20위를 거두며 활약했지만, 이탈리아에서 경주를 마치고 며칠 뒤 수면 중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부검에서는 명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몇 달 뒤 미망인은 그가 EPO를 사용했다며 남편의 죽음이 다른 선수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바란다고 밝혔다.

 

시계를 최근으로 돌려보자. 2018년 경기 도중 심장 마비로 사망한 벨기에의 미카엘 굴러라트(Michael Goolaert)처럼 젊은 자전거 선수들의 비보가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적혈구를 늘려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EPO 도핑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젊은 자전거 선수들이 갑자기 목숨을 잃을 때마다 EPO는 자연스럽게 유력한 범인으로 몰리곤 한다.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한 그들의 사망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답변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EPO는 위험한가?

 

EPO와 관련된 뉴스를 읽어보면 적혈구용적률(hematocrit)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온다. 적혈구용적률은 전체 혈액 중에서 적혈구가 차지하는 비율로서 혈액 농축의 지표다. EPO를 사용하면 적혈구의 수가 늘어나므로 적혈구용적률이 오르고, 선수들이 땀 흘려 운동한 뒤 탈수로 인해 더욱 상승한다. 이렇게 혈액의 점성(粘性)이 증가하면, 쉽게 말해 끈적끈적해지면 혈전(血栓;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이 생성될 수 있다. 혈전이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 즉 관상동맥을 막을 때 심장마비가 발생한다.

 

EPO의 효과가 널리 퍼졌지만, 아직 검출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1990년대는 EPO 도핑의 황금기였다. 선수들은 EPO를 사용해 경기력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마음 한 켠에는 혹시 수면 중에 심장마비를 겪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일부 선수는 계속 움직여서 혈전 생성을 막겠다며 대회 기간 중에도 잠을 청하는 대신 밤새 호텔 복도를 돌아다니는 촌극을 펼치기도 했다.[2] 이처럼 EPO에 대한 염려와 부정적 소식은 투석 환자의 빈혈을 교정한 ‘구원자’ 약물의 위상을 한 논문의 제목처럼 운동 선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량 살상’ 약물로 변화시켰다.[3]

 

하지만 EPO가 위험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당장 논란의 시작이 된 <뉴욕타임스> 기사만 해도 일 주일 뒤 ‘부검에서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의 약물 복용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 수정되었다. EPO가 자전거 선수들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논문과 기사 61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어 왔을 뿐 위험성을 입증할 실질적 증거나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3] 또한 은밀하게 시행되는 도핑의 특성 상 실제 선수들의 EPO 복용 여부나 정확한 용량을 파악할 수 없는 한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는 직접적인 위험성보다는 EPO가 심혈관계에 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관심을 받고 있다. EPO는 적혈구를 증가시켜 근육에 보다 많은 산소를 보내기 때문에 운동 선수의 훈련량은 증가하고, 회복 속도는 빨라진다. 따라서 EPO 도핑을 하면 심혈관계의 변화가 통상적인 훈련을 통해 이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나타날 수 있다. 한 예로 1995년과 1999년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한 선수들 심장의 심장을 비교한 연구를 살펴보자(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이 기간 사이에 선수들의 EPO 사용은 증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5년 사이 선수들 심장의 크기는 커지고, 혈액을 뿜어내는 능력은 감소하는 방향으로 적응이 일어났다[4]

 

5년 사이 선수들 좌심실의 내부 직경(left ventricular internal diameter; LVIDd)은 증가했고, 좌심실의 박출률(left ventricular ejection fraction; LVEF)은 감소했다. 혈액순환지 제공

 

격렬하게 훈련하면 선수들의 몸이 탄탄하게 바뀌듯 심장에서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연구에서는 지구력 종목의 선수들의 심장이 과도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심장 근육의 섬유화(fibrosis)나 관상 동맥의 석회화(calcification)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5] 이를 바탕으로 강도 높은 운동으로 촉발된 심장의 구조적인 변화 양상이 EPO에 의해 촉진되면서 젊은 선수들의 심장 마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한계점이 존재한다. 선수들의 EPO 복용 여부나 정확한 용량을 알 수 없기에 간접적인 영향 역시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운동이 유발한 심장의 구조적 변화가 실제 심장 마비와 연관이 되는지 여부 역시 아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6] 정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으므로 현 시점에서는 EPO를 위험한 약물로 몰아가거나 반대로 안전하다고 섣불리 면죄부를 주지 않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EPO는 윤리적인가?

 

‘바로 이 지점에 윤리적인 난제가 존재한다. 만일 EPO 주사와 유전학적 교정을 반대해야 한다면, 왜 나이키의 ‘고도 조절 숙소’는 반대하면 안 되는가?’[7]

- 마이클 샌델-

 

도핑은 기본적으로 의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공정성을 추구하는 스포츠 정신이라는 특징 때문에 쉽게 윤리적 문제로 비화된다. 한 예로 2018년 국내 프로야구에서 두산 베어스의 김재환이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것을 들 수 있다. 빼어난 성적을 거둔 것은 맞지만, 2011년에 테스토스테론 검출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기에 수상 자격을 놓고 큰 논란이 있었다. 단순히 실력만 가지고는 ‘가장 가치 있는 선수’가 되기 어려운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2018년 국내 프로야구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김재환은 도핑 전력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겨레 제공 

 

혈액 도핑은 어떨까? 지금까지 지구력을 끌어 올리기 위한 여러 방법 -고지대 거주/저지대 훈련, 고지대와 유사하게 기압과 산소를 조절하는 고도 방(altitude room), 수혈, EPO- 을 살펴봤다. 다들 체내에 산소를 많이 전달하도록 적혈구 수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현재 고도 방은 허용되지만, 수혈과 EPO 사용은 금지돼 있다. 인위적으로 경기력을 향상시키므로 모두 금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맞지 않을까? 한때 우리 나라에 정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마이클 샌델 교수가 다른 책 <완벽에 대한 반론>에서 파고든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윤리성만 따져 모든 방법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단편적 접근일 수 있다. 과학적으로 살펴 보면 각 방법 사이에는 효과와 기전 측면에서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혈구를 직접 제공하는 수혈은 즉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자전거 선수 타일러 헤밀턴은 이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으로 표현했다.[8] EPO는 골수에서 적혈구의 생성을 유도하므로 시간이 걸리고,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지구력을 약 7퍼센트(%) 향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

 

반면에 고지대 거주-저지대 훈련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고도 방의 효과는 수혈이나 EPO에 비해 극적이지 않다. 고도 방의 경기력 향상 효과는 1퍼센트(%)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그나마도 개인 차이가 크다.[10] 또한 이미 적혈구 수치가 최고치에 근접해 있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반응이 둔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도 방을 수혈이나 적혈구와 동일한 선상에 놓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고도 방, 즉 ‘고지대 거주'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저지대 훈련'의 병행이 필요하다. 즉 부단한 훈련이 전제되어야 심폐기능이 발달하면서 지구력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와 달리 수혈이나 EPO는 훈련을 통해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경기력 향상이라는 목표에 바로 도달한다.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을 두는 스포츠 정신에 입각하면 생리적 지름길을 취하는 행위는 도핑이다. 반면 최선을 다해 훈련한 뒤에 사용하는 고도 방은 운동 후에 받는 마사지나 꼼꼼하게 조절하는 식이 요법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기에 허용된다.

 

도핑을 찬성하는 측에서 자주 언급하는 약물은 EPO이다. 원래 체내에 존재하는 물질이어서 적발이 쉽지 않고, 미켈레 페라리가 말했듯이[11] 관리 하에 사용하면 안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기 때문에 EPO가 주로 도마에 오른다. 일리가 있지만 EPO가 금지 약물로 결정된 이유는 공정한 경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문제를 논의할 때에도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함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EPO 논란 되짚어보기

 

올해 봄 1500미터 달리기가 주종목인 케냐의 아스벨 키프로프(Asbel Kiprop)가 EPO 도핑 혐의로 4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과 2011년, 2013년, 2015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3연패라는 엄청난 기록을 거두었지만, 약물의 도움으로 이룬 성과라 생각하니 허탈해진다(물론 선수 본인은 EPO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항변하고 있다). 적혈구용적률 수치를 제한해도, EPO 검사를 도입해도, 선수생체여권을 적용해도 선수들이 금단의 열매 EPO의 유혹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도핑의 위험성을 강조할 때 EPO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위험하고, 선수들의 목숨을 앗아간 물질로 묘사되곤 한다. 이런 시각은 자칫 사람들의 뇌리에 부정적 기억만 남겨 실제 EPO의 도움을 받아야 할 환자들로 하여금 약물 사용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 어디까지나 선수들이 EPO로 지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문제일 뿐, 만성질환으로 인한 빈혈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EPO를 사용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반대로 일각에서는 적발이 어렵고, 크게 유해하지 않은 만큼 EPO 도핑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내에서 적혈구를 증가시키는 기전이 EPO와 고도 방 사이에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기에 얼핏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EPO를 사용하는 것은 운동 선수가 고된 훈련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에 지름길로 손쉽게 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는 EPO를 단편적인 시각으로 옹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잘 따져보자. 그놈이 그놈 아니다.

 

1. Fisher, L.M., Stamina-Building Drug Linked to Athletes' Deaths. The New York Times, 1991. http://www.nytimes.com/1991/05/19/us/stamina-building-drug-linked-to-athletes-deaths.html.

2. Weber, J., Michael Goolaerts' death raises question as to why so many cyclists suffer heart attacks. DW News, 2018. http://www.dw.com/en/michael-goolaerts-death-raises-question-as-to-why-so-many-cyclists-suffer-heart-attacks/a-43321799.

3. Loez, B., The Invention of a ‘Drug of Mass Destruction’: Deconstructing the EPO Myth. Sport in History, 2011. 31(1): p. 84-109.

4. La Gerche, A. and M.J. Brosnan, Cardiovascular Effects of Performance-Enhancing Drugs. Circulation, 2017. 135(1): p. 89-99.

5. O'Keefe, J.H., et al., Potential adverse cardiovascular effects from excessive endurance exercise. Mayo Clinic proceedings, 2012. 87(6): p. 587-595.

6. Levine, B.D., Can intensive exercise harm the heart? The benefits of competitive endurance training for cardiovascular structure and function. Circulation, 2014. 130(12): p. 987-91.

7. 마이클샌델, 완벽에 대한 반론: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와이즈베리, 2016: p. 51.

8. 최강, 적혈구를 늘리는 고지대 적응 훈련은 도핑일까? 한겨레, 2019.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01203.html.

9. Murray, T.H., Good Sport: Why Our Games Matter -- and how Doping Undermines Them.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p. 141-4.

10. Sinex, J.A. and R.F. Chapman, Hypoxic training methods for improving endurance exercise performance. J Sport Health Sci, 2015. 4(4): p. 325-32.

11. 최강, 22년만에 발견한 스포츠 ‘영약’…전설을 써내려가다. 한겨레, 2019.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12260.html.
 
2019.11.8 한겨레 미래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