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 조현병 환자들, 우리사회의 평범한 이웃으로 바라보기

2016. 12. 28. 14:31글모음

[30] 피해 망상


※ 이전 글 참조 (‘환청, 정신분열증, 조현병’ 제대로 알고 편견에서 벗어나기)


세프 하시드(Joseff Hassid)라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다. 명연주자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그의 어릴 적 연주를 들은 뒤 200년에 한 번 태어나는 바이올린 연주자라 말했고, 다수의 유명 바이올린 연주자를 길러낸 칼 플레시는 그를 이제껏 만난 제자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문하생으로 여겼으며, 명반주자 제럴드 무어는 그와 음반 작업을 하면서 곧바로 그의 천재성에 매료되었다.[1] 백문이 불여일견. 그가 남긴 짧은 소품을 하나 들어보도록 하자.


[ 조세프 하시드가 연주하는 타이스의 명상곡. https://youtu.be/KOTBsnec0Ao ]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하시드는 17세에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공식적인 첫 무대를 가졌다. 갓 15살이 되었을 때 곡을 녹음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던 그의 공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오래 불타오르지 못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잠옷만 입고 온종일 거리를 돌아다니고,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부적절하게 웃고, 옷을 수시로 갈아입는 엉뚱한 모습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때리고 위협하는 공격성을 보이기 시작했다.[2]


결국 하시드는 18세에 병원에 입원한 뒤 조현병 진단을 받고 당시로서는 첨단 치료법이었던 인슐린코마요법, 전기경련요법을 받았다.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어 이듬해에 퇴원했지만 이내 증상은 재발했다. 재입원 뒤 그는 자신을 가두는 병원을 고소하겠다며 위협하거나 주변 사람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증상의 호전 없이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1950년 또 다른 첨단 치료법이었던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으나 감염 후유증이 발생해 2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오래전의 일이어서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아버지를 공격하고, 병원을 위협하고, 주변 사람을 의심하던 하시드의 행동은 조현병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인 피해 망상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 망상이 뭐길래 촉망받던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무서운 환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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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시절에 당직을 설 때면 수련의(인턴)들이 종종 정신과 환자가 응급실에 방문했다고 전화하곤 했다. 하루는 한 신출내기 수련의가 “인턴 OOO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감시한다는 ‘헛소리’를 주증상으로 23세 여자 환자가 내원했습니다”라고 했다. 딴에는 인턴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에 ‘헛소리’라는 말을 의학 용어로 다시 보고할 것을 주문하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상황에 맞지 않는 언어’라는 답변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헛소리, 순화하면 상황에 맞지 않게 쓰는 말 정도로 표현되는, 망상(妄想)의 정확하고 자세한 정의는 무엇일까? 망상은 외부 현실에 대한 부정확한 추론을 바탕으로 하는 잘못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매우 굳건해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도 흔들리지 않으며,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상식에서 동떨어져 있는 특징을 지닌다. 그렇다고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공상까지 망상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도 이내 현실을 직시하는 공상과 달리 망상은 주변의 온갖 설득에도 끄떡하지 않고, 개인의 생각과 판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 으슥한 밤에 낯선 남자가 뒤에 따라올 때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더라도 이웃집 아저씨

  인 것을 알게 된 뒤 안도한다면 망상이 아니다. https://youtu.be/8R50Tjk8x_U]


상생활에서 비교적 흔히 들어봤을 망상 중 하나가 바로 의처증, 의부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질투 망상이다. 의심받는 배우자가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입증해도 질투 망상을 품고 있는 배우자의 의심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다. 질투는 매우 강력한 감정이기에 자해 혹은 타해와 같은 공격성으로 쉽게 이어진다. 오죽하면 영화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에서 로라(줄리아 로버츠 분)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해 남편한테서 도망치려 했겠는가.


또 다른 종류로 색정 망상이 있다. 이 망상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보통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자신과 사랑에 빠져 있다고 잘못 믿는다. 상대 여성이 극구 싫다고 하는데도 ‘사실은 나를 좋아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따라다니는 스토커나 ‘나는 오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란 믿음에 연예인의 집을 무단 칩입하는 소위 사생팬이 이런 망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미국의 존 힝클리처럼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던 극단적인 예도 있다.


[ 1981년 힝클리의 암살 시도 장면. 사건 이후 줄곧 정신병원에서 치료 감호를 받아오던 힝클리는

  올해 35년 만에 영구 석방되었다. https://youtu.be/hVDDdl4MheE]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예는 망상만 나타나는 망상 장애에 해당한다. 망상 장애에는 이외에도 과대 망상, 피해 망상, 신체 망상이 동반될 수 있다. 그런데 망상 장애의 평생유병률은 0.2퍼센트(%)로 드물기 때문에 실제로 접하기가 쉽지 않다.[3]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더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조현병 환자의 망상이다. 물론 망상은 주요우울증이나 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가 심각할 때도 나타날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이기에 망상을 (환각과 함께) 조현병의 대표 증상이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주변과 무관하지 않은 피해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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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개봉한 영화 <블랙 스완(Black Swan)>은 조현병 환자의 심리를 잘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는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에서 순수한 백조와 관능적인 흑조라는 두 배역을 동시에 맡은 주연이 된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니나의 백조 연기에 비해 흑조 연기는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이후 자신의 연기력 부족을 고민하던 니나는 새로 입단한 릴리의 도발적인 연기를 보면서 부담과 불안을 느끼다가 점점 망상과 환각에 빠져들게 된다. 니나가 보인 망상은 릴리가 자신을 쫓아다니면서 배역을 뺏으려 한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피해 망상이었다.


[ 니나의 피해 망상이 그려지는 <블랙 스완>의 한 장면. 아래 대사 참조. https://youtu.be/MFXhQQ5q1t4 ]


니나 : 토마스. 토마스.

토마스 : 왜?

니나 : 그여서는 안돼. 그여서는 안돼.

토마스 : 그래. 먼저 가 있게. 곧 가도록 할게. 무슨 일이야?

니나 : 릴리가 내 대역이라면서?

토마스 : 원래 예비로 한 명씩 있는 거야. 릴리가 최고의 선택이지.

니나 : 아니야. 릴리는 네 역할을 원한단 말야.

토마스 : 세상의 모든 발레리나가 네 역할을 원해.

니나 : 아니야. 이건 달라. 릴리가 나를 쫓고 있어. 나를 대신하려고 해.

토마서 : 누구도 너를 쫓고 있지 않아.

니나 : 아니야. 제발 믿어줘.


현병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망상이 피해 망상이다. 피해 망상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잘못 믿는 것으로,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학교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조별 과제를 수행할 때 따돌리거나 속인다고 믿고,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해고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며 업무를 방해한다고 확신한다. 또한 길을 걸을 때 국정원 직원이나 경찰이 자신을 도청, 미행하면서 감시한다고 여기거나 이웃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음식에 독을 탔다는 느낌에 식사를 거부한다.


흔히 ‘조현병의 망상’ 하면 “외계인들이 뇌 속에 조종 장치를 심어놓고 갔어요”나 “외부 세력이 아무런 상처도 내지 않고 내 장기를 다른 사람의 장기와 바꿔치기 했어요”와 같은 괴이한 망상(bizarre delusion)을 떠올린다. 하지만 피해 망상의 상당수는 괴이하지 않은(non-bizarre) 특징도 지닌다. 학교나 직장에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거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 아닌가. 또 세월호 집회 현장을 남 모르게(혹은 눈에 띄게) 쳐다보던 폐회로텔레비전(CCTV) 사건[4]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의 감시 역시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있을 법한, 그럴 듯한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는 피해 망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 측면에서 볼 때 망상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적개심, 불만을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투사(投射; projection)해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뒤집어 씌우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렇기에 피해 망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현병 환자의 주변 환경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를 주는 박해자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일 수 있고, 망상의 내용은 동시대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로 올해 5월 있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을 떠올려 보자.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조현병 환자가 23세 여성을 흉기로 네 차례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여성이 나를 견제하고 괴롭힌다”라는 피해 망상이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피의자의 증상 밑바탕에는 우리 사회에 수년 전부터 퍼지기 시작한 여성 혐오와 비하가 깔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현병 환자의 자아 기능이 취약한 특징을 고려하면 피의자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사회 현상이 증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망상이 실제로 사회를 반영할까? 1881년부터 2000년까지 슬로베니아에서 처음 입원한 조현병 환자들의 망상의 내용을 분석한 연구를 살펴보자.[5] 종교 망상이나 마술적 망상은 1941년부터 1980년  사이에 가장 적게 관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로 공산주의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 연구진은 당시 정부가 종교 억압 정책을 펴는 바람에 제대로 신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이와 관련한 망상도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론했다.그러나 이후 1981년부터 2000년 사이에는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사람들이 다시 신을 찾기 시작하면서 영적 존재가 자신을 홀리고, 쫓고, 괴롭힌다는 주장하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00trumanshow.jpg » 트루먼의 일상이 생중계되는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진 뒤 유사한 내용의 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처/Wikimedia Commons 우리나라에서도 망상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한양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1980년대에 비해 1990년대에 정치적 내용을 주제로 한 망상이 감소하고, 애정문제, 직장 등에 관련된 망상이 증가했다.[6] 반면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망상의 내용에 큰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1990년대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경제, 사회, 문화 영역도 안정화 단계에 이른 것을 그 원인으로 추측했다. 피해 망상만 따로 살펴봐도 1980년대에는 경찰, 국정원(과거 안기부)과 같은 정치적 박해자가 28%를 차지했지만, 1990년대에는 12%, 2000년대에는 5%로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7]


‘트루먼 쇼 망상(The Truman Show delusion)’이란 용어가 있다.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에서 일상이 24시간 내내 생중계되던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 분)처럼 자신의 삶이 리얼리티 쇼처럼 촬영되고, 중계된다고 믿는 망상이다. 이 망상은 2012년 동명으로 발표된 논문[8]에서 처음 소개되었는데, 망상이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따라서 조현병 환자를 대할 때 각각의 배경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평가와 치료에서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조현병 환자를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실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현병 환자의 피해 망상과 공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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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 사건 직후 범죄의 성격이 ‘묻지마 범죄’인지 아니면 ‘여성 혐오 범죄’인지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었다. 하지만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성명서에서 지적했듯이 피의자에 대한 충분한 정신 감정조차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되는 논쟁은 소모적이다.[9] 오히려 사건 초기 피의자의 진단명과 치료력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면서 조현병 환자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증가했다. 피해 망상을 갖고 있는 조현병 환자는 언제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편견이 바로 그것이다.


‘조현병 환자가 위험하다’라는 시각은 사실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 1,003명 중 52.5%는 조현병 환자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나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응답했다.[10] 대중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언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국내 언론의 조현병 관련 기사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시각의 기사가 46.7%로 중립적/긍정적 시각의 기사(30.1%)보다 많았다. 그 중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한 것은 “조현병 환자가 위험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였다.[11]


00cinema.jpg » 많은 사람이 조현병 환자를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연쇄살인마로 나온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 분)와 같은 위험한 범죄자로 생각한다. 출처/씨네21


현병 환자는 정말 위험한 존재일까? 2009년 스웨덴의 파젤(Fazel)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공격성의 주범은 따로 있어 보인다.[12] 파젤 교수는 스웨덴에서 1973년부터 2006년 기간의 조현병 환자 8,003명과 일반인 80,025명의 의무 기록과 강력 범죄 기록을 꼼꼼히 살펴봤다. 먼저 단순히 조현병 환자들과 일반인들의 범죄율을 비교해보니 각각 13.2%와 5.3%로 나타났다. 산술적으로 조현병 환자들이 일반인들보다 2배 이상 높게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진이 환자들이 남용하는 알코올이나 각성제, 환각제 등의 약물 사용(물질 장애) 유무에 따라 조현병 환자 집단을 나눈 뒤 추가 분석을 해보니, 그 결과는 달라졌다. 물질 장애가 동반된 조현병 환자에서 범죄율은 27.6%로 상승한 반면에, 그렇지 않은 조현병 환자에서는 8.5%로 낮아졌다. 일반인보다 범죄를 더 저지를 수 있는 위험도는 각각 4.4배와 1.2배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조현병 자체보다는 물질 장애가 공격성의 주된 원인임을 시사한다. 연구진이 관련 연구 20건을 메타 분석한 다른 연구에서도 이런 양상이 확인되었다.[13]


그래도 여전히 의구심이 걷히지 않을 수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실제 범죄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2014년 한 해 동안 일어났던  강력 범죄(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3만 4126건 중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는 731건으로 전체의 2.1%에 불과하다.[14] 전체 범죄를 비교하면 정신장애 범죄자의 비율은 0.4%로 더욱 내려간다.[15] 이런 통계에서 정신장애는 정신이상, 정신박약, 기타 정신장애를 모두 포함하기에 실제 조현병 환자만 해당하는 비율은 더 낮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해 보면,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조현병 환자는 공격적이지 않으며 일반인과 비교할 때 이들의 범죄율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조현병 환자가 거친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는 대개 면담이나 약물 치료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피해 망상 때문이다.[16] 누군가 자신을 해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분노하고,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서 조현병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치료 접근성이 좋아져 환자들이 필요한 도움을 적절하게 받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조현병 극복을 돕는 사회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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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린 삭스(Elyn Saks)라는 법학 교수가 있다. 그는 젊었을 때 조현병으로 3차례 입원했는데, 이로 인해 대학원 시절 불가피하게 여러 차례 휴학을 해야 했다. 증상이 심할 때 그는 “내가 여러 사람을 죽였다. 죽인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말하는 기이한 피해 망상을 갖고 있었고, 그밖에 환각, 와해된 사고와 행동이 만성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조현병 진단을 내린 치료진은 그의 예후가 매우 불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삭스 교수의 삶은 의료진이 내렸던 부정적 예측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중간중간 위기가 있었지만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현재 그는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법학, 심리학, 정신과학 교수를 겸임하면서 학문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꾸렸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제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똑같은 조현병 환자였는데 엘린 삭스의 삶은 글의 앞 부분에서 소개했던 조세프 하시드의 삶과 많은 차이가 난다. 이유가 무엇일까? 2007년 <버틸 수 없는 중심(The Center Cannot Hold)>이라는 제목의 책[17]을 출간하면서 자신의 조현병 병력과 극복 과정을 공개한 삭스 교수의 답은 이렇다.


“첫째, 훌륭한 치료를 받았어요. 둘째, 나와 내 병을 이해하는 가까운 가족과 많은 친구들이 있어요. 셋째, 나를 너무나도 지지해주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 2012년 테드(TED) 강연에서 자신의 조현병 병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엘린 삭스. 짧은 강연이지만

  응축된 고백은 그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준다.

  https://youtu.be/w4obYjXWDHk ]


현병의 평생유병률은 1%로 알려져 있다. 대략 계산해도 우리나라에서 약 50만 명이 평생에 한 번은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사회적 위축 혹은 의욕 저하와 같은 음성 증상을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흔한 선입견과 달리 위험하지 않고 잠재적 범죄자도 아니다. 간혹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한다”라는 피해 망상에 사로잡힐 때 불안, 초조와 함께 공격성을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적절한 치료를 통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나아가 조현병 역시 일찍 발견하고 적절하게 치료하면 약 50%의 환자는 거의 혹은 어느 정도로 회복되어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예외적인 일이 발생할 때마다 ‘미친’, ‘비정상인’ 조현병 환자를 시설에 수용하고 통제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곤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아직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도, ‘정상’이지도 않음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심각한 증상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조현병 환자들은 우리의 평범한 가족, 이웃, 친구, 동료일 수 있음을 꼭 기억하도록 하자.


[주]


[1] Campbell, M., The Great Violinists. 2011: Faber & Faber.

[2] Feinstein, A., Psychosurgery and the child prodigy: the mental illness of violin virtuoso Josef Hassid. Hist Psychiatry, 1997. 8(29 pt 1): p. 55-60.

[3] Association, A.P.,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2013: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2571.html.

[5] Skodlar, B., M.Z. Dernovsek, and M. Kocmur, Psychopathology of schizophrenia in Ljubljana (Slovenia) from 1881 to 2000: changes in the content of delusions in schizophrenia patients related to various sociopolitical, technical and scientific changes. Int J Soc Psychiatry, 2008. 54(2): p. 101-11.

[6] 정현진 외, 조현병 입원 환자의 망상과 환각 :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비교. Korean J Biol Psychiatry, 2013. 20: p. 80-5.

[7] Oh, H.Y., D. Kim, and Y.C. Park, Nature of Persecutors and Their Behaviors in the Delusions of Schizophrenia: Changes between the 1990s and the 2000s. Psychiatry Investig, 2012. 9(4): p. 319-24.

[8] Gold, J. and I. Gold, The “Truman Show” delusion: psychosis in the global village. Cogn Neuropsychiatry, 2012. 17(6): p. 455-72.

[9] http://www.docdocdoc.co.kr/202571.

[10] 이연희, 문병윤, 김나연, 정신보건과 관련한 사회적 낙인에 관한 조사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8.

[11] Park, J.H., et al., Use of the terms “schizophrenia” and “schizophrenic” in the South Korean news media: a content analysis of newspapers and news programs in the last 10 years. Psychiatry Investig, 2012. 9(1): p. 17-24.

[12] Fazel, S., et al., Schizophrenia, substance abuse, and violent crime. JAMA, 2009. 301(19): p. 2016-23.

[13] Fazel, S., et al., Schizophrenia and violence: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PLoS Med, 2009. 6(8): p. e1000120.

[14] http://www.spo.go.kr/spo/info/stats/stats02.jsp.

[15] http://www.police.go.kr/portal/main/contents.do?menuNo=200141.

[16] Keers, R., et al., Association of violence with emergence of persecutory delusions in untreated schizophrenia. Am J Psychiatry, 2014. 171(3): p. 332-9.

[17] Saks, P.L.P.P.E.R., The Center Cannot Hold: My Journey Through Madness. 2014.

2016.8.18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http://scienceon.hani.co.kr/?mid=media&category=90222&document_srl=42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