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 소외되고 배제되고...외로운 마음이 겪는 사회적 통증

2016. 12. 23. 11:48글모음

[20] 사회적 소외


 »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될 때 발생하는 마음의 아픔은 실제 몸이 겪는 통증처럼 괴로울 수 있다. 소외와 관련한 연구에서 사용되는 게임 '사이버볼'. 좌측: 참가자를 게임에 포함시키는 설정. 우측 : 참가자를 게임에서 소외시키는 설정. 출처/각주[2], 변형


본의 만화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20세기 소년>이라는 작품이 있다. 20세기가 끝나가는 1999년부터 연재해 2007년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며,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3부작에 걸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마케팅 전략 탓인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만화의 내용은 전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친구’라는 존재와 이에 맞서는 집단 사이의 대결에 관한 것인데,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들이 모두 어린 시절 같은 동네의 친구들인 점이다.


00socialpain1.jpg » 20세기 소년의 주요 등장인물. 출처/한겨레21전지구적인 음모를 꾸미던 ‘친구’의 정체는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결말에서야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그 정체를 다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도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친구’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에 “이건 뭥미?” 하며 다시 1권을 꺼내들었다.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정독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더 한 뒤에야 비로소 ‘친구’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친구’가 지구 멸망을 계획하게 된 계기만 간단히 언급하면, 어릴 적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또래 모임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도 존재감이 없어서 대부분은 그를 다른 친구와 혼동하거나 심지어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만화이긴 하지만 또래 사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소외되던 친구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비뚤어져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설정이 생각할수록 무섭게 다가온다.



심리적 고통 = 육체적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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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란 단어를 들으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 아닌 추억이 있다. 스무 살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병무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재수생이던 나는 병적기록부에 개인신상을 적다가 직업란에서 의문에 부딪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망설임 없이 ‘대학생’ 혹은 각자의 직업을 적는 게 아닌가. 소심하던 나는 대충 적지 못하고 공무원에게 재수생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봤다. 심드렁한 표정의 공무원이 준 답은 매우 간단했다. ‘무직’.


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졌다. 분명 그곳에 나 말고도 재수생이 여럿 있었겠지만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쓰는 순간 내 자신이 외톨이처럼 느껴지면서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나는 대학생 집단에서 소외되고, 직장인 집단에서 배제되는 ‘주변인’이란 생각에 울컥했던 것이다. 당시 대입 실패로 낮아진 자존감도 한몫 했겠지만 소속된 집단이 없고 관계 맺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 주는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쓰려 온다.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처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면 왜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아픈 것일까? 미국의 아이젠버거(Eisenberger) 교수가 2003년 발표한 뇌영상 연구 결과를 통해 답을 찾아나서 보자.[1] 먼저 연구진은 참가자 13명에게 ‘사이버볼(Cyberball)’이라는 컴퓨터 게임을 하게 했다(맨 위 그림). 참가자들은 놀이용 원반 던지기와 비슷하게 서로 공을 주고받는 이 게임을 하는 동안 연구진이 자신들의 뇌 활동을 측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을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연구진이 미리 설정해놓은 대로 컴퓨터가 게임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참가자가 몇 번 공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점차 컴퓨터는 참가자를 집단에서 소외시켜 나갔다. 즉 다른 참가자들이 참가자에게 공을 건네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주고받도록 설정해 참가자가 집단 내에서 거부당하는 느낌을 겪도록 유도했다. 연구진인 참가자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를 통해 이들 뇌의 반응을 살펴봤다.


연구 결과 참가자들이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낄 때 뇌의 배측 전측대상피질(dorsal anterior cingulated cortex)과 우측 복측 전전두피질(ventral prefrontal cortex)이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연구진은 실험 뒤 참가자들이 점수 매긴 불쾌한 감정의 정도와 두뇌 영역의 활성도 사이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참가자들이 소외되는 동안에 불편하게 느낄수록 배측 전측대상피질은 더욱 활성화하는 반면에, 우측 복측 전전두피질의 활성도는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00socialpain3.jpg » 소외감을 느낄 때 활성화 소견이 관찰된 배측 전측대상피질과 우측 복측 전전두피질. 출처/각주[1]

통증과 관련해, 배측 전측대상피질은 아픔으로 인해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과 연관된다. 고통이 발생하면 ‘뭔가 잘못 되었구나’라고 인지하는 일종의 ‘경보 장치(alarm system)’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측 복측 전전두피질은 통증이 유발한 불편한 마음과 부정적인 정서를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통증이 유발하는 불쾌감을 둘러싸고 두뇌 영역이 반대되는 활동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활성화 경향은 뇌가 육체적 고통을 겪을 때에도 관찰되는 양상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이 동일한 신경해부학적 바탕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다시 말해 집단에서 소외될 때 경험하는 심리적 고통은 실제 몸이 아파서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유사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뇌의 활동 양상만 놓고 본다면 내가 스무 살 때 병무청에서 마음이 아팠을 때 실제 몸이 아픈 것과 같은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진통제 = 항우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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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아픔’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임을 보여준 아이젠버거 교수의 연구 결과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는 2년 전 출간된 한 책[3]의 제목이 신조어 ‘따돌림 자살(bullycide)’일 정도로 집단 따돌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던 때였다. 자연스럽게 이 연구는 집단 따돌림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실제 보여주는 증거로 많이 소개되었다. 아울러 학계에도 많은 영감을 제공해 여러 분야에서 많은 후속 연구가 진행되었다.


중 한 연구는 병무청에서 징병전담의사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에 내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내가 하던 일은 신체검사를 받으러 병무청에 온 젊은이들의 신체등급을 판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존재감이 미미했던 병원과 달리 병무청에서 정신과의 위상(?)은 남달랐다. 군 인성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나온 사람들, 이전 판정에 동의하지 못해 재검사를 신청한 사람들, 훈련소에서 귀가한 사람들로 인해 내 자리는 신체검사장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다. 흔히 병원에서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가 주요 과를 뜻하는 ‘메이저(major)’인데, 병무청에서는 정신과가 메이저였다.


문제는 다른 동료 의사들이 일을 다 마쳐도 내 일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리!” 하면서 나를 기다려주던 동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시작했다. 또 신체검사가 내 자리에서 지연되자 수검자들이 다른 과를 먼저 들린 뒤 정신과를 방문하도록 순서가 조정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의 업무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동료들한테서 미묘하게 배제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속좁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이를 직접 드러내지는 못했다. 소외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민하던 중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타이레놀! 진통제로 많이 쓰이는 타이레놀의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이 사회적 고통을 감소시킨다(Acetamihophen reduces social pain)”란 제목으로 2010년에 발표된 논문[4]을 읽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직장에서 소외되면서 몸이 아픈 것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던 내게 이 연구는 마른 땅의 단비처럼 다가왔다. 더구나 타이레놀은 당시 처방전을 발행할 수 없던 나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이었다. 그래서 약국에서 구입한 타이레놀을 복용한 뒤 출근해봤다. 나의 사회적 고통이 조금이나마 경감되길 바라면서.


과가 궁금해질 수 있는데, 그 전에 해당 연구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의 드월(DeWall) 교수 연구진은 60명의 참가자를 각각 절반씩 ‘약물 집단’과 ‘위약(僞藥; placebo) 집단’으로 나눴다. 전자는 아세트아미노펜 500밀리그램(mg)을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먹었고, 후자는 생김새와 용량은 똑같지만 효과는 전혀 없는 가짜 아세트아미노펜, 즉 ‘가짜 약(위약)’을 먹었다. 두 집단은 이렇게 3주 동안 약물을 복용하면서 매일 저녁마다 하루 동안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점수로 매겼다. 그 결과 아세트아미노펜을 규칙적으로 먹은 집단이 사회적 고통을 덜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00socialpain4.jpg » 위약을 복용한 집단(검은색 네모)에 비해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집단(하얀 원)에서 마음의 상처를 덜 받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경향은 더 커짐. 출처/각주[4] 행동을 관찰한 실험에 이어 뇌영상 실험이 추가로 진행되었다. 연구진은 25명의 참가자를 이전 실험처럼 두 집단으로 나눠 약물 혹은 위약을 3주 동안 먹게 했다. 그 뒤 참가자들이 연구실에서 사이버볼 게임을 하는 동안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을 진행했다. 연구진은 통증으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와 연관되는 배측 전측대상피질과 전측 섬엽(anterio insula)에 관심을 기울였다. 분석 결과 게임에서 소외될 때 진짜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집단에서 두 영역의 활성도가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몸이 아플 때 먹는 진통제가 마음이 아플 때 먹는 항우울제의 효과도 갖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병무청에서 내게 시행한 임상(?) 실험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침, 저녁으로 타이레놀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도 동료 의사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과 마음의 고통은 여전했다. 실패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제 연구와 달리 이중 맹검(double blind: 실험에서 주관성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실험 진행자와 참여자 모두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약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복용하는 게 마음에 걸려 1주일만 먹은 게 원인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처음 논문을 접했을 때의 전율은 이내 심드렁한 회의로 바뀌었다.


개인적 실험이 실패로 끝나버려서 이 연구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연구는 사실 방법상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논문에서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의 허가나 참가자들의 동의 여부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의 윤리적 문제를 들 수 있다. 또한 반감기(체내에 들어온 약물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필요한 시간)가 4시간인 약물을 왜 3주나 복용했는지, 약물의 용량을 결정한 근거는 무엇인지 등 설계 자체에도 미비점이 많았다. 특히 다양한 진통제 중 왜 꼭 타이레놀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논문의 첫 원고(manuscript) 제목은 ‘아세트아미노펜’ 이 아니라 ‘타이레놀’로 시작했다).



심리적 고통 ≠ 육체적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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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름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였던 내가 2G 폰을 고집(?)하는 이유는 몇 년 전 미개통 스마트폰을 사용했던 경험 때문이다. 원래 조작이 간단한 컴퓨터 게임만 선호하던 내게 초창기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던 게임들은 딱 안성맞춤이었다. 매일 두 눈이 벌게지도록 게임을 하던 중 이러다가는 폐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국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스마트폰을 서랍 한 켠으로 치워 버렸다.


마트폰이 대중화한 뒤에도 2G폰 사용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신저나 소셜네트워크(SNS)가 보편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모임의 총무가 공지사항을 카톡방이나 네이버 밴드에만 올리면서 스마트폰이 없는 내 존재를 깜빡 잊고 따로 연락하지 않는 일이 종종 생겼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로 사회적 소외를 경험했지만 예전과 달리 마음에 크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마음의 아픔을 몸으로 덜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심하던 나의 심성이 나이 먹으면서 넉넉해진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속좁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혹은 원인 제공을 내가 먼저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총무는 나 때문에 매번 일을 두 번 하는 셈이지 않던가. 이도 아니면 기존의 연구들이 뭔가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고통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배측 전측대상피질이나 전측 섬엽은 사실 뇌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활성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왜거(Wager) 교수는 ‘심리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과 유사하다’란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2014년에 발표했다.[5] 연구진은 먼저 60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두 종류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참가자의 왼쪽 손목에 열 자극을 가해 신체적 통증을 유발했고, 헤어진 연인이나 가까운 친구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회적으로 단절된 감정을 일으켰다. 이어서 참가자가 육체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의 뇌 반응에 대한 비교가 진행되었다.


분석 결과 두 형태의 고통은 모두 뇌에서 동일한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동일한 신경 회로를 공유한다는 기존 이론과 부합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연구진이 뇌영상의 해상도를 높이고, 정교하게 결과를 분석하자 두 자극이 유발한 활성화의 형태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이들 영역 중 배측 전측대상피질의 경우 통증 자극이 심리적이냐 육체적이냐에 따라 뇌의 다른 영역과 기능적으로 연결되는 형태 또한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00socialpain5.jpg »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을 받을 때 뇌에서 통증을 처리하는 영역의 활성화 양상. 통증의 정서적인 불쾌감에 관여하는 배측 전측대상피질(dACC), 전측 섬엽(sINS)이나 구체적인 체성감각 정보에 관여하는 배측-후측 섬엽(dpINS), 이차 체성감각피질(S2)에서 통증 자극에 따라 활성화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남. 출처/각주[5], 변형

론 이런 결과가 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전혀 관련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연구진이 3년 전에 현재 자료의 일부(40개의 뇌영상)를 분석한 연구[6]에서도 확인되듯이 통증과 거절을 경험할 때 뇌에서 활성화하는 영역이 많이 겹친다. 또한 둘록세틴(duloxetine)이란 항우울제는 신체적 통증을 동반한 우울증의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따라서 사회적 고통과 관련해 기존의 이론에 바탕을 둔 여러 연구 결과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사회적 소외가 주는 마음의 고통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집단에서 배제되는 일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굉장히 흔해졌기 때문일까? ‘사회적 고통 (social pain)’ 이론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왔다. 이 매력적(?)인 주장을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하지만 당연시되는 사실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내용을 찾는 것이 진정한 과학의 길 아니겠는가. 앞으로 더 많은 후속 연구를 통해 사회적 고통을 둘러싼 뇌의 비밀이 더 많이 밝혀지길 기대해 본다.



외로운 그들, 내부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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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연말 세간의 관심거리는 단연 ‘땅콩 회항’이었다. 뉴욕 공항에서 발생한 비행기 회항 사건을 둘러싸고 마카디미아를 땅콩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원론적인(?) 질문부터 사회에 만연한 갑의 횡포에 대한 고민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 중 많은 관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박창진 사무장이다. 항공사와 국토부의 조율 아래 조용히 묻힐 뻔한 사건이 박 사무장의 국토부 조사 거부와 방송사 인터뷰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8]


러나 박 사무장이 낸 용기의 대가는 커 보인다. 내부고발자를 ‘영웅’이 아닌 ‘배신자’로 치부하는 경향이 큰 우리 사회에서 경영진의 잘못을 덮지 않고 공개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관심사원’ 대접이었다. 박 사무장은 사실 피해자인데 결과적으로 내부고발자가가 된 흔치 않은 경우에 해당되지만 그가 사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결국 그는 잠깐의 업무 복귀 뒤 다시 병가를 냈다.


00socialpain6_RYJ.jpg » 황우석 사건의 최초 제보자인 류영준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 출처/한겨례 자료사진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공익제보 이후 내부고발자들의 삶은 그들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대부분 나쁜 방향으로 흘러간다. 황우석의 사기를 제보한 일명 ‘닥터K’(현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 류영준의 삶만 봐도 그렇다.[9] 그는 2005년 한 방송사 게시판에 글을 올린 뒤 근무하던 병원을 반강제로 그만뒀고, 이후 1년 6개월가량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사실상 도망을 다녔다. 2년 뒤 다른 병원에 가까스로 들어갔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의 강한 반대와 경계에 부딪혔다. 내부고발 뒤 그는 외딴 섬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었다.


집단 내부의 잘못을 외부에 알리는 행동은 조직에 대한 ‘충성(loyalty)‘보다 정의를 향한 ‘공정(fairness)’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우선할 때 나타난다.[10] 2008년 ‘4대강 실체는 운하’라고 양심선언을 한 김이태 연구원을 예로 들면, 그는 자신이 속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대한 눈먼 지지 대신 과학적 양심과 공공의 알 권리라는 더 큰 선을 선택한 것이다.


러나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내부고발자는 조직의 단합을 저해한 나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소외로 이어진다.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자’, ‘변절자’라는 손가락질이었고, 심지어 성격이상자, 인격파탄자라는 음해까지 나돌았다.[11] 비단 김용철 변호사뿐만이 아니다. 30명의 내부고발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9명은 공익제보 뒤 조직의 동료나 후배가 거의 매일 자신과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대답했다.[12] 이 조사에서 사회적 소외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내부고발자는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공익제보 뒤 이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를 위해 2011년부터 시행중인 ‘공익신고자보호법’을 더 넓게 적용하는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해 보인다. 아울러 공익신고에 대한 법의 엄정한 처리도 있어야겠다. 1990년대 이후 대표적 공익신고 38건 중 31.5%인 12건에서만 비리혐의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13]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투명성 유지에 큰 도움이 되는 건강한 내부고발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우리가 보듬어야 할 외로운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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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시인 정현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한 적이 있다. 단 두 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가 읽을 때마다 마음에 길게 여운을 주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곱씹어 보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집단에서 소외되고 배제될 때 겪는 마음의 고통은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외로움보다 더 클지 모른다.


실 집단에서 따돌림 당하는 쓰라린 경험은 더 이상 어린 학생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직장인들도 회사 내에서 여러 형태로 소외되면서 마음 앓이를 하고 있다. 동료 인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처럼. 또한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이란 신조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인터넷 공간도 더 이상 서로 소외시키는 행동에서 자유롭지 않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다.


집단에서 거절당할 때 발생하는 마음의 아픔은 실제 몸이 겪는 통증처럼 괴로울 수 있다. 그것이 은유이든 아니면 실제이든 말이다. 더욱이 한 연구에 따르면 따돌림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면역 기능에 변화를 초래해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14] 사회에서 단절되는 경험이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만큼 사회적 소외와 따돌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낮은 마음으로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나와 상관없는 무인고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찍이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이 노래했듯이 ‘그 누구도 저 혼자는 온전한 섬이 아니고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한 부분’이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사회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꼭 잡아줄 때 진정으로 우리 사이에 있는 그 섬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참고 문헌


[1] Eisenberger, N.I., M.D. Lieberman, and K.D. Williams, Does rejection hurt? An FMRI study of social exclusion. Science, 2003. 302(5643): p. 290-2.

[2] Eisenberger, N.I. and M.D. Lieberman, Why rejection hurts: a common neural alarm system for physical and social pain. Trends Cogn Sci, 2004. 8(7): p. 294-300.

[3] Marr, N. and T. Field, Bullycide: Death at Playtime. 2001: Success Unlimited.

[4] Dewall, C.N., et al., Acetaminophen reduces social pain: behavioral and neural evidence. Psychol Sci, 2010. 21(7): p. 931-7.

[5] Woo, C.W., et al., Separate neural representations for physical pain and social rejection. Nat Commun, 2014. 5: p. 5380.

[6] Kross, E., et al., Social rejection shares somatosensory representations with physical pain. Proc Natl Acad Sci USA, 2011. 108(15): p. 6270-5.

[7] Stahl, S.M., Stahl‘s Essential Psychopharmacology: Neuroscientific Basis and Practical Applications. 2008: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669794.html

[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6874.html

[10] Waytz, A., J. Dungan, and L. Young, The whistleblower’s dilemma and the fairness?loyalty tradeoff. J Exp Soc Psychol, 2013. 49(6): p. 1027-33.

[11] http://h21.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28815.html

[12] 박흥식, 이지문, 이재일, 내부고발자 그 의로운 도전. 2014: 한울아카데미.

[13]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0013.html

[14] Vaillancourt, T., et al., Variation in hypothalamic-pituitary-adrenal axis activity among bullied and non-bullied children. Aggress Behav, 2008. 34(3): p. 294-305.


2015.3.27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http://scienceon.hani.co.kr/?mid=media&category=90222&page=2&document_srl=251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