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22. 12:09ㆍ글모음
[17] 안젤로 모소를 기억함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때에 생리학자 안젤로 모소(1846-1910)는 간단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고안해 뇌가 활동할 때 뇌 혈류도 증가함을 밝혀냈다. 100년 넘게 잊혔던 모소의 연구는 2013년 한 연구자의 노력으로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이제라도 안젤로 모소라는 이름과 그가 만든 인체순환저울이라는 기계를 기억해보면 어떨까?
» 모소가 제작한 인체 순환 저울. 뇌가 쉬고 있을 때와 활동할 때의 혈류량의 변화를 측정했다. 출처/ 주[2]
189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3세 소년은 항구 근처의 작고 오래된 음악가게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했다.[1] 악보에 운명처럼 마음을 뺏긴 소년은 이후에 매일 연구와 연주에 몰두한 끝에 24세가 되던 1901년 가을 대중 앞에서 이 곡을 처음 선보였다. 약 200년 동안 동면 중이던 음악이 아름다운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었다. 이후 유명 연주자로 성장한 소년은 대략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전곡을 녹음했는데, 그가 이 곡에 부여한 음악적 규범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주자들에게 시금석이 되고 있다.
이 연주자의 이름은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이다. 사실 카잘스 이전에도 여러 연주자들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이 곡을 교육 목적의 연습곡 정도로 여겨 실제 무대에서 연주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카잘스는 평생 동안 연주가 불가능한 부분을 다듬고 새로운 연주 기술을 고안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오랫동안 잊혔던 이 곡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카잘스의 발견과 수고 덕분에 우리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곡 중 프렐류드(prelude)]
오랫동안 잊혔던 논문의 발견
»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안젤로 모소(Angelo Mosso: 1846-1910). 출처/ 주[4] 2013년 5월 이탈리아의 산드로니(Sandrone) 교수는 토리노(Turin) 대학의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한 오래된 문서 하나를 공개했다.[2] 그것은 바로 신경혈관 연동(neurovascular coupling), 즉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뇌 신경세포가 활동하고 이에 맞춰 뇌로 공급되는 혈류가 증가하는 것을 확인한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안젤로 모소(Angelo Mosso: 1846-1910)의 1884년 논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영국의 찰스 로이(Charles Roy)와 찰스 세링턴(Charles Sherrington)이 1890년 발표한 연구결과 덕분에 신경혈관 연동을 처음 입증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3] 하지만 산드로니 교수의 발견과 수고 덕분에 오랫동안 잊혔던 한 연구자의 업적이 새롭게 조명받게 되었다.
모소의 연구를 학문적으로 감상하기 전에 먼저 그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4] 모소는 1846년 5월 30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했지만 모소는 뛰어난 성적 덕분에 보조금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해 토리노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1870년 우등졸업(magna cum lade)으로 학업을 마친 그는 이후에 유럽의 여러 연구소에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그래프를 이용한 인간의 생리 현상 연구에 몰두했다. 모교로 돌아온 뒤 그는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나갔고, 그의 지휘 아래 토리노 의대는 당시 '생리학의 메카'로 여겨졌다.
모소는 혈액 순환, 근육 피로, 고산병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는데, 그의 남다른 점은 자신의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기구를 고안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혈압을 정교하게 측정하기 위해 혈압계를 가다듬고, 에르고그래프(egrograph; 근육의 작업 능력이나 피로도를 측정하는 장치)를 개발하고, 높은 산 위에 오른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감압실(low pressure chamber)을 이용했다. 그의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연구 방법은 어릴 적에 목수 아버지 옆에서 일했던 경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궁금증을 풀기 위한 마땅한 도구가 없으면 아예 새로운 도구를 제작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소의 성격은 뇌가 활동할 때 뇌로 공급되는 혈류가 증가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1876-1894)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과학과 기술로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바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었기에 그는 단단하게 뇌를 감싸고 있는 두개골에 결손이 있는 환자들을 먼저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5] 아기들의 두개골이 덜 발달했을 때 나타나는 천문(숨구멍)을 통해 호흡을 관찰할 수 있듯이 그는 두개골의 갈라진 틈을 통해 혈류의 변화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 모소의 연구에 참여한 환자들. 모두 두개골에 물리적 결손을 갖고 있음. 출처/ 주[5], 변형

모소는 이름 부르기, 곱셈 하기, 배우자의 첫 인상 떠올리기와 같은 자극을 통해 뇌의 활동을 유발했다. 그 결과, 환자들이 인지적 혹은 정서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뇌가 활동할 때 뇌로 공급되는 혈류가 증가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뇌의 활동에 따라 뇌 혈류의 양이 변화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주장이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실질적으로 확인된 점을 고려하면 두개골 결손 환자에서 기압 변화를 통해 뇌 혈류를 측정한 방법이 시대를 매우 앞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소의 방법은 두개골이 온전하지 않은 환자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뇌 활동에 따른 혈류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그가 제작한 ‘정교하게 균형 잡힌 탁자’[6]가 곧 인간 뇌의 생리를 모두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넘쳐났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어라는 언어 장벽 때문에 모소의 새로운 방법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졌고, 100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산드로니 교수를 통해 구체적인 형태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기계"
환자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뇌 활동에 따른 뇌 혈류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모소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인체(혈액)순환 저울(human circulation balance)’이라는 기계를 제작했다. 이 기계는 지렛목 위에 올려 놓은 나무탁자로 이뤄져 있었다. 그는 피실험자를 탁자 위에 편하게 눕힌 뒤에 혈액이 신체 구석구석에 균등하게 퍼지면 피실험자의 무게 중심이 지렛목의 중심축 위에 놓이도록 피실험자를 서서히 이동시켰다. 이를 통해 무게의 평형 상태가 이뤄지면, 미묘한 신체적 변화에도 저울은 머리 또는 발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는 뇌가 활동할 때 뇌로 공급되는 혈류가 증가하면 무게의 변화로 인해 저울이 머리 쪽으로 기울 것으로 예상했다.
» 모소가 제작한 인체 순환 저울. 뇌가 쉬고 있을 때와 활동할 때의 혈류량의 변화를 측정했다. 출처/ 주[2]
» A와 B : 피실험자의 발과 손의 맥박을 측정하는 기구. C : 혈류량 측정 기구. 출처/ 주[2]
실험에는 22세 의대생과 연구실 기술자가 참여했다. 이들은 본격적인 측정에 앞서 긴장을 풀고 편안히 기계 위에 누워 안정을 취했다. 약 한 시간 뒤 모소가 피실험자들에게 전보 송신기의 타전 소리 같은 금속음을 들려주자 저울은 머리 쪽으로 기울었다. 일반인에서도 같은 결과가 확인된 것이다. 후속 실험에서 모소는 피실험자에게 제시하는 과제의 강도를 바꾸어 보았다. 그 결과 피실험자가 신문이나 소설을 읽을 때보다 철학 서적처럼 난해한 책을 읽을 때 저울이 더 빠르게 머리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이를 뇌혈류의 공급량이 과제의 복잡성에 비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놀라운 점은 모소의 연구가 최첨단 뇌영상학이 다루는 여러 주제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피실험자가 한 시간 정도 편안히 누워 있던 것은 분석 과정에서 과제수행 상태와 비교되는 휴지 상태(resting state)에 해당된다. 또한 과제의 강도를 늘려나가는 일련의 방법은 ‘사건 관련 기능적 자기공명영상(event-related fMRI)’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아울러 그가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여러 변수를 통제한 것은 ‘신호 대 잡음 비율(signal-to-noise ratio)’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 일치한다. 그를 ‘기능적 신경영상(functional neuroimaging)’의 선구자라 칭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5]
모소는 가능한 한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산드로니 교수는 인체순환저울이 실제작동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과학 기술로 신호(뇌 혈류의 변화)와 잡음(호흡, 움직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는 실제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런 장담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영국의 필드(Field) 교수는 산드로니 교수의 논문을 읽은 뒤 역사적인 실험을 재현해보기로 했다.[7]
필드 교수는 기본적으로 모소의 방법에 충실했지만 몇몇 부분에 수정을 가했다. 예를 들면 모소는 호흡으로 인한 혈류의 변동을 줄이기 위해 무거운 균형추를 이용했지만 필드 교수는 나무판의 머리 쪽을 전자저울에 고정한 뒤 변동치를 측정했다. 또한 모소가 직접 제작한 측정 기구를 통해 평형 상태에 영향을 주는 변수를 처리한 반면에 필드 교수는 과학 발전의 산물인 컴퓨터를 이용해 결과 분석에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했다.
» 현대적인 형태로 새롭게 탄생한 모소의 인체 순환 저울. 출처/ 주[7]
필드 교수의 재현 실험에는 14명의 참가자가 참여했다. 이들은 매트와 베개가 마련된 나무판에 편안히 누워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거나 음악 감상과 함께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가 재생하는 화려한 기하학 형상을 봤다. 이는 피실험자가 자극이 없을 때, 청각 자극만 있을 때, 청각과 시각 자극이 함께 있을 때 뇌 혈류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핀 것이다. 그 결과 피실험자에게 자극이 주어진 직후 저울에 가해지는 힘이 감소했다가 다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힘의 변화는 피실험자가 음악만 들을 때보다는 음악을 들으면서 비디오를 볼 때 더욱 두드러졌다.
» 파란선은 자극이 없을 때, 빨간선은 청각 자극만 있을 때, 녹색선은 청각 자극과 시각 자극이 동시에 있을 때를 나타냄. 0-2초 사이에 자극이 주어졌는데 이후 저울에 가해지는 힘의 감소와 증가가 이어서 나타남. 출처/ 주[7]
저울에 가해지는 힘이 빠르게 감소한 것은 뇌 혈류량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에서도 관찰되는데 뇌 세포가 활동하면서 발생한 부산물을 품은 혈액이 목에 있는 정맥(경정맥)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어서 저울에 가해지는 힘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증가하는 것은 목에 있는 동맥(경동맥)을 통해 포도당과 산소를 운반하는 새로운 혈액이 뇌로 들어오면서 뇌가 다시 일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측정된 힘은 0.005뉴튼(N)으로 매우 작았지만 모소의 ‘인체 순환 저울’이 충분히 실현 가능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억해야 할 이름, 안젤로 모소
영화 <21그램(21gram)>의 결말에 “사람이 죽는 순간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예외 없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주장은 미국 의사인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이 1907년에 발표한 논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8] 그는 6명의 말기 결핵 환자들을 대형 저울 위에 침대째 올려 놓고 임종 순간에 무게의 변화를 살피는 방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피실험자의 수가 적고, 도구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결과에 영향을 주는 변수의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의 실험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당시 과학의 한계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사실 던컨 맥두걸의 연구결과는 그동안 사람들한테 과분한 대접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안젤로 모소와 그의 연구 결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온 듯싶다.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때에 그는 간단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통해 뇌가 활동할 때 뇌 혈류도 증가하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당시에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논문이 학계에서 주목받고 널리 알려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소의 실험은 이내 잊히고 논문은 100년 넘게 어두운 곳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한 연구자의 노력으로 안젤로 모소의 연구결과는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이제라도 ‘안젤로 모소’라는 이름과 ‘인체순환저울’이란 기계를 기억해보면 어떨까? 그것이 오랫동안 잊혔던 학자에게 우리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리라.◑
참고 문헌
[1] Siblin, E., The Cello Suites: J. S. Bach, Pablo Casals, and the Search for a Baroque Masterpiece. 2011: Grove/Atlantic, Incorporated.
[2] Sandrone, S., et al., Weighing brain activity with the balance: Angelo Mosso‘s original manuscripts come to light. Brain, 2014. 137(Pt 2): p. 621-33.
[3] Roy, C. and C. Sherrington, On the regulation of the blood-supply of the brain. J. Physiol, 1890. 11: p. 85-108.
[4] Sandrone, S., et al., Angelo Mosso (1846-1910). J Neurol, 2012. 259(11): p. 2513-4.
[5] Zago, S., et al., The Mosso method for recording brain pulsation: the forerunner of functional neuroimaging. Neuroimage, 2009. 48(4): p. 652-6.
[6] James, W.,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 New York: Henry Holt & Company.
[7] Field, D.T. and L.A. Inman, Weighing brain activity with the balance: a contemporary replication of Angelo Mosso’s historical experiment. Brain, 2014. 137(Pt 2): p. 634-9.
[8] MacDougall, D., Hypothesis concerning soul substance together with experimental evidence of the existence of soul substance. American Medicine, 1907. 2: p. 240-3.
2014.10.20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http://scienceon.hani.co.kr/?mid=media&category=90222&page=2&document_srl=20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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