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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혜심의 '인삼의 세계사'
믿거나 말거나, 어렸을 때 코피가 많이 났었다. 이런 저런 검사도 받아보고, 약도 먹어보고, 코 속 혈관도 지져(?)보고 그랬지만 효과가 없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면 코피가 바로 나왔다. 늦잠 자고 싶은 날은 그래서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가 나면 콧구멍을 둘둘 만 휴지로 틀어막고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누워도 되는 보증수표였으니까.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몸이 허해서 그럴 수 있다며 부모님을 종종 나를 한의원으로 데려갔다. 한의사 선생님은 진맥을 한 뒤 대부분 비슷한 말을 건넸다. 간의 열이 코로 이동해 코피가 난다는 것이었다. 보약 처방과 함께 한의사 선생님은 역시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열이 많은 내게 행여라도 인삼은 먹이면 안 된다는 것이였다. 나야 좋았다...
2020.09.22 -
김진호의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예전에 환자와 부모님이 진료실을 방문했다. 주된 이유는 젊은 환자가 부모를 계속 때려서였다.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봤다. 자세한 사정이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방문했던 병원에서 “환자가 부모에 대한 화가 너무 많이 쌓여 있다. 당분간 어지간하면 맞아줘라. 그러면 환자의 화가 다 풀리면서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처방을 받고 부모는 그대로 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 맞다 보니 몸이 성한 데가 없고, 너무 아프고,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병원을 옮긴 것이라고 했다. 허걱! 어느 집단이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과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최면으로 전생을 소환했던 사람도 있고, 성폭행 후 성치료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고, 사주나 점을 진료와 섞어서 보는 사람도 있다. 뭐 그래도 ..
2020.09.14 -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전에 일했던 병원은 특이하게 지하 1층에 진료실이 있었다. 더 특이한 것은 1층은 고기집이었다. 그리고 2층부터 5층까지 병동이 있었다. 내 방은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당연히(?) 창문도 없어서 아침에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바깥에 비가 오는지, 차가 밀리는지, 소방차가 지나가는지, 터진 쓰레기 봉투에서 냄새가 올라오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볼에 나온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곳이었다. 로버트 맥팔레인이 쓴 ‘언더랜드’는 특이한 책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장르를 정의하기 힘들다. 자연과학? 철학? 역사? 탐험? 여행? 환경? 에세이? 그렇다. 발 밑이라는 가까운 공간이지만 어두움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 언더랜드를 지은이가 여러 방향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설명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2020.08.31 -
어노인팅 예배캠프 2020 LIVE
어노인팅 예배캠프 2020 LIVE 음반이 한 달 전에 나왔다. 2012년부터 매해 나오는 예배 캠프 음반은 정규 음반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어서 좋다. 이전과 비슷하게 창작곡과 번역곡이 섞여 있고, 어노인팅 멤버뿐만 아니라 강명식, 조준모, 김복유와 같은 유명 CCM 가수의 곡도 포함된 점이 눈에 띈다.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예배 찬양에 쓰이는 곡과 소위 CCM 곡이 나뉘는 경향이 있는데 어노인팅의 적절한 편곡은 양자를 잘 아우르고 있어서 좋았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곡은 ‘기뻐하며 왕께 노래 부르리’였다. 올네이션스 경배와찬양이 30년 전에 낸 전하세 예수 4집에서 처음 접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강산이 3번이나 바뀔 수 있는 시간의 간격은 이 곡에, 나아가 예배 음악 전반에 어떤 차이..
2020.08.28 -
김정후의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6-10살 때 주공 아파트에 살았었다. 큰 길에서 상당히 경사진 길을 오르고 또 올라가면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었다. 한 4-5년 살았으니 그렇게 오래 산 곳은 아니지만 더 어릴 때의 기억은 없으니 이곳이 내게는 고향하면 떠 오르는 곳이다. 매일 놀이터에서 흙장난 치고, 뒷산에 올라가 불장난 치고, 막 개막한 프로야구에 맞춰 해태 타이거스 점퍼 입은 채 야구하고, 담벼락 밑에서는 구슬놀이, 딱지놀이 하고, 비가 오면 흙 길에 수로 만들고, 눈이 오면 비료푸대로 미끄럼 타고, 아파트의 갖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바꼭질, 탐험놀이, 전쟁놀이… 그렇게 시간을 보낸 곳이다. 20대 후반 갑자기 어릴 때 살던 곳이 떠 올랐다. 오랜만에 전주에 내려가 어릴 적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류장에 내리니 큰 길..
2020.08.19 -
제프리 케인의 '삼성 라이징'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 월급이 썩 높지 않았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평촌으로 병원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예술의전당이 가까워서였으니까(슬램덩크 서태웅도 아니고 -_-). 물론 더 가까운 병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술의전당 지척에 있는 반포성모병원은 경기도 및 충청도까지 순환 근무가 있다 하길래 제외했다. 삼성서울병원 역시 가까웠지만 음, 여기는 지원할 성적이 되지 않았다. -_-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서울병원의 수련의 월급은 내 월급과 앞자리가 달랐다. 이럴 수가! 예술인의 마음은 어이없이 흔들렸다. 아, 다들 이래서 삼성 이름이 붙은 직장에 가려고 하는 구나. 내 마음에 삼성이 진지하게 각인된 첫 순간이었다. 삼성은 우리 국민에게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해외에 나가 삼성 광고를 ..
2020.08.13